월북한 최덕신의 '이념 곡예' 40년 공개
  • 고제규 기자 (unjusa@e-sisa.co.kr)
  • 승인 2000.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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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애증의 현대사 엮어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장 류미영씨(78)의 둘째 아들 최인국씨(54)는 한때 어머니와 만나기를 거부했다. ‘월북자 자식’이라는 족쇄에 시달린 고통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 지난 8월16일과 17일 두 차례 류단장은 인국씨와 막내딸 순애씨(48)를 23년 만에 상봉했다. 대부분 상봉자 가족이 한국전쟁 때 헤어진 것에 비하면 1986년에 헤어진 이들의 상봉은 남다르다.

류씨의 남편은 최덕신 전 외무부장관이다. 남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그는 1986년 부인과 함께 자진 월북했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가장 거물급 인사의 월북이었다. 북한판 황장엽 망명이었다. 남겨진 가족의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최덕신이 자식들의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북쪽으로 망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월북 동기를 추적한 기자는 최씨가 월북 직전 집필하기 시작한 회고록을 입수했다. 그는 <민족과 나>(1983년), <남한땅에 30년>(1985년), <김일성 그이는 한울님>(1988년), <만고의 위인 김정일>(1990년) 등의 책을 남겼다. 이러한 회고록을 통해 그의 월북 동기를 짐작할 수 있다.

최덕신·류미영 씨의 가족사는 우리 역사의 축소판이다. 류미영씨 아버지 류동열은 상해 임시정부 통수부 참모총장을 지냈다. 광복군 총사령관에 해당한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했고,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통위부장(현재 국방부장관)을 지내며 국방군 창설에도 관여했다.
아버지 최동오는 김일성의 스승

최덕신의 아버지 최동오는 김일성의 스승이었다. 독립운동가로 중경 임시정부의 법무부장을 역임한 그는 만주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화성의숙 숙장을 맡아 활동했다. 이때 김일성 주석은 6개월간 이곳에서 공부했다.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 우파 대표로 활약한 그는 1948년 4월에는 김 구와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류동열·최동오 씨는 모두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1986년 월북한 최덕신을 만나 김일성은 최동오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화성의숙 다닐 때 최선생은 젊은이들이 진보적인 서적을 탐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김일성 그이는 한울님>)

반대로 최덕신은 박정희의 스승이었다. 그는 1948년 7월 육군사관학교 6대 교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가 지도한 학생들이 박정희를 비롯한 5·16 쿠데타의 주역인 육사 8기생들이다. 박정희와 최덕신의 첫 번째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남북 지도자를 제자로 둔 셈이다. 남북 최고 지도자와의 인연은 결국 부자 간의 거리를 떼어놓았다. 최동오는 월북한 뒤 1956년 7월에는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최덕신은 군복을 벗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월북을 피랍이라고 우겼다. 중국 국민당의 대령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광복 뒤 장인 유동열과 함께 창군 작업에 동참했다가 1947년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대했다. 그가 승진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은 미국 군사고문단장 로버트의 눈에 띄면서부터다. 로버트 고문단장의 신임을 받아 그는 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반공의 최일선에서 공산군 격퇴를 위해 싸웠다. 국군 11사단장인 그는 호남 일대 유격대를 소탕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산청·함양·함평·거창 양민학살 사건이 그가 수행한 임무다. 피해 유가족들은 최덕신의 격벽청야(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세우고 들을 태워버린다) 전술 때문에 희생이 컸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거창사건을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결코 잊을 수 없으며 잊어서는 안될 괴롭고 안타까운 악몽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이 사건으로 1951년 12월 사단장에서 물러났다. 사단장 직을 물러난 뒤에도 육군대학 부총장과 보병학교 교장을 지냈다.
쿠데타 정당성 외국에 홍보

또한 1953년 휴전협정 때는 유엔군측 한국군 대표로 뽑혔다. 미군측의 휴전협상을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을 읽고 그는 휴전협상에 불참했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조인식에도 옵서버 자격으로만 참석하고 서명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그를 ‘판문점의 용사’로 치켜세웠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은 그는 1956년 중장으로 예편한 뒤 베트남 공사에 임명되었다.

5·16 쿠테타는 그가 베트남 공사로 있을 때 일어났다. 그는 쿠테타 세력을 지지했다. 주동 인물인 장도영은 그의 부하였고, 박정희 역시 제자였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쿠데타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외국에 친선사절단을 파견했는데, 동남아 지역을 최덕신에게 맡겼다. 이때부터 박정희와 최덕신의 밀월이 시작되었다. 1961년 7월 그는 박정희와 만났다. 박정희는 그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협조해 달라고 말했다. 3개월 뒤 그는 9대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어 1963년까지 장관 직을 수행했다. 외무부장관 시절 그는 한·일 외상회담에 참여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협상은 김종필이 맡아 진행했다. 최덕신은 얼굴 마담 역할을 거부하고 1963년 9월 외무부장관을 그만둔 뒤 서독 주재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의 배려로 자신이 부임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서독 주재 대사로 있으면서 그는 박정희와 뤼프케 대통령의 상호 방문을 추진하는 성과도 이루었다.

하지만 1967년 동백림 사건은 그의 외교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서독에 거주하는 교포·유학생·예술인 등을 간첩으로 몰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해 온 것이다. 서독 정부는 주권 침해라며 국교 단절도 불사하겠다고 항의했다. 최덕신은 대사직을 마치면서 당시 서독 외무장관이던 브란트를 만나려고 했지만, 브란트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최덕신은 회고록에서 동백림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인 한국대사관 참사가 자신에게도 알리지 않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명령에 따라 공작을 폈다고 주장했다.
최덕신 아버지 최동오는 천도교 대표로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20년대 최동오는 천도교 종의원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최덕신은 1967년부터 천도교 교령으로 활동했다. 정치 실세인 그가 교령으로 취임하자 천도교는 중흥기를 맞았다. 그는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71년 1월 박정희를 만나 2억원 융자와 50만 달러 외국 차관 알선을 약속받았다. 이로써 당시로서는 고층인 15층 천도교회관(수운회관)이 완성되었다. 대신 그는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지지 유세를 하며 천도교 표를 몰아주었다.

1971년 4월27일 치러진 7대 대통령선거는 박정희와 김대중의 맞대결이었다. 신민당 후보인 김대중은 1960년대 ‘독재 시대’를 넘어 1970년대 ‘희망찬 대중의 시대’를 만들자며 야당 바람을 일으켰다.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평화 통일을 위한 4대국 보장안 등 혁신적인 공약을 제시했다. 최덕신은 김대중의 4대국 보장안을 비판하며 박정희를 지원 유세했다. 그는 대선을 지원한 대가로 수운대학 건설을 지원받고자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당선된 이듬해 유신헌법을 선포해 더 이상 종교계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때부터 박정희와 사이가 어긋났다고 그는 회고했다.

특히 그는 두 가지 사건이 충격적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1973년 8월8일 김대중 납치 사건과 이듬해 8월15일 육영수 저격 사건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비판했던 것이 마음의 빚으로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납치 사건 뒤 김대중에게는 연민을, 박정희에게는 공포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마음의 빚 때문에 생환한 김대중에게 위문 전화를 했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그는 육영수 저격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문세광이 쏜 총에 육여사가 저격당했다는 정부 발표에 그는 의혹을 던졌다. 문세광의 권총 탄알이 어떻게 유도 미사일 모양으로 원호를 그리면서 육여사의 후두부를 타격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박정희와 결별, 미국 망명길에

최덕신은 1976년 2월17일 일본으로 출국했다. 그 뒤 그는 타이완을 거쳐 동생이 머무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77년 11월18일 그는 도쿄에서 ‘박정희 정권의 민족 말살 정책과 매국적인 군사 파쇼 정책을 규탄한다’는 폭탄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갑작스런 출국과 박정희 규탄 성명서 발표와 관련해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박정희와 갈등설·도피성 출국설 등이 나돌았다.
그는 회고록에서 천도교가 세를 키워가면서 동학사상이 유신 정책과 맞지 않아 군사 정부가 천도교 내분을 조장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공금 횡령 혐의로 고발한 일부 세력이 중앙정보부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최덕신이 교령일 때 당시 청년선전부장이던 주선원 교화관장(54)도 최교령 반대파였던 ㄱ씨가 북한 파견 첩보부대 ‘켈로’ 출신이었다고 말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천도교 내분도 수습하지 않은 채 출국했다. 공금횡령설에 대해 천도교 중앙총부는 지난 8월11일 ‘최덕신 전 교령이 공금 횡령 등 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없다. 당시 정치적 상황이 언론기관들로 하여금 최덕신 전 천도교 교령 출국을 공금 횡령 등의 비리로 왜곡하게 만들었다’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최덕신은 도쿄 성명을 발표하고 바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박정희 비판은 당시로서는 야당 수준의 발언이었다. 김형욱처럼 박정희 정권 내부의 비리를 까발리지는 않았다.

최덕신이 북한을 방문한 계기는 최홍희와의 친분 때문이다. 최홍희는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태권도 국제연맹 총재를 역임했고 반한 활동을 벌이며 자주 북한을 방문했다. 도쿄 성명을 주선한 이도 바로 최홍희다. 큰아들 건국씨(58)는 아버지가 1970년대 후반에도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아버지가 월북한 이유를 김일성 주석의 인간적인 배려 때문인 것으로 짐작했다. 회고록에서도 북측이 그의 영구 입국을 위해 공들였다는 대목이 여러 군데 발견된다.

월북 결행, 북한에서는 대환영

최덕신은 1986년 9월25일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에 영구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월북 뒤에 조평통 부위원장과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북에서도 고위직을 보장받은 셈이다. 1986년 김일성 훈장을 받았고, 1989년에는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 위원장과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가 북한에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일성 주석의 각별한 배려 때문이었다. 냉전 시대여서 북쪽에서도 그의 활용 가치는 높았다. 최덕신의 인생 전기는 극영화 <민족과 운명>으로도 만들어져 상영되었다(상자 기사 참조).

최덕신은 1989년 11월16일 췌장암으로 숨졌다. 북한은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그는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그의 사망 이후에는 류미영씨가 남편의 역할을 이어받았다. 범민련 북측 중앙위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원을 역임했다. 현재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상임위 위원을 맡고 있다.

북한에서 부모의 활동은 그대로 남한에 있는 자식들에게 짐이었다. 둘째 인국씨는 유명한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부모님 월북과 함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정보기관의 감시로 실직이 잦았고, 결국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을 수밖에 없었다. 부인 역시 행상과 파출부로 가계를 도왔다. 막내딸 순애씨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인국씨는 정부가 나서지 않는 한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23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모든 것을 화해했다. 고통만큼 혈육에 대한 그리움도 컸기 때문이다. 남북 최고 지도자와의 인연과 악연은 한가족을 이제야 만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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