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통령 벤 검찰, 정치 족쇄 벗을까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5.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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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비리 고비마다 ‘정치 자금 不수사’로 현실 타협…“권력도 법 아래 있다” 홀로서기 절호의 기회
검찰의 처지에서 본 노태우씨 비자금 사건 수사는, 93년부터 몇몇 검사들이 추진해온 ‘검찰권 독립 운동’이 검찰 전체로 확산되는 절호의 기회를 초래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노씨 비자금 수사가 검찰권 독립의 계기로 이어질 수도 있게 된 것은, 지난 10월31일 김영삼 대통령이 이 사건을 ‘노태우씨 개인의 부정축재 사건’으로 규정지은 데 이어, APEC 정상회담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11월17일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경 유착을 단절하고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는 전화 위복을 이룩하자”고 언급한 데 첫 번째 원인이 있다.

검찰권 독립 운동이란 ‘검찰은 정치권과 권력의 시녀’라는 비아냥을 끊기 위한 노력이다. 구체적으로는 검찰 상층부가 외압을 막아주는 사이 수사 검사는 정·관계 거악(巨惡)들의 비계좌를 하나하나 추적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권 독립 운동을 방해한 첫 번째 장애물은 검찰 상층부의 수사 중지 명령이었다. 수사 검사들은 동화은행 비자금과 슬롯 머신 비자금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검찰 상층부의 압력에 저항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난 5월 검찰은 현역 노동부장관을 수뢰 혐의로 구속하는 데 성공했다.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을 어느 정도 벗어던지게 된 것이다.

뼈 아픈 좌절, 동화은행 비자금 수사

그러나 여야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정치권만은 검찰이 손댈 수 없는 ‘성역’이었다. ‘정치 자금은 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 검찰 내의 불문율로 굳어질 정도로 정치권은 치외법권 지대가 되었다. 그러던 차에 노씨 비자금 수사가 정치권의 비자금을 추적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노씨 비자금을 낱낱이 밝히라’는 열화와 같은 국민 여론에 힘입은 바 크다. 국민 여론을 의식한 김영삼 대통령이 검찰의 독자적인 수사를 보장해 줌으로써 검찰은 ‘정치권의 시녀’를 탈출할 수 있는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정치 자금을 수사하라는 국민 여론을 조성하는 데는 함승희·홍준표 변호사가 큰 역할을 했다. 노씨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출간된 함승희 변호사의 저서 <성역은 없다>는 정치 자금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노태우씨의 사과 발표가 있던 날 텔레비전에 출연한 홍준표 변호사가 “대통령은 국정 전반에 걸쳐 포괄적인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가 받은 돈은 전부 뇌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 것도 올바른 검찰 수사를 촉구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93년 함승희 대검찰청 연구관이 주도한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수사는 검찰권 독립을 위한 의미 있는 몸부림이었다. 안영모 동화은행장의 비자금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함검사는 이원조 의원(92년 당시), 이현우 경호실장, 이용만 재무부장관, 김종인 경제수석 등의 비계좌를 발견했다. 이 비계좌는 재벌 총수의 비자금을 정치권 지도자들의 비계좌로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였다.

검찰의 생리를 모르는 일반인들은 ‘수사 검사가 권력형 비리를 발견했을 때 알아서 덮어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노련한 수사 검사는 뭔가 냄새를 맡았을 때 더욱 집요해지는 근성이 있다. 함검사가 고구마 줄기처럼 연결된 비계좌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자 이곳저곳으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함승희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난마처럼 얽힌 비자금의 이동로를 따라가자 거액이 들어 있는 비계좌가 나타났는데, 전부 가명으로 되어 있어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톱으로 튕기듯 일부러 건드려 보았더니 그 즉시 반응이 왔다. 그런 반응을 보면서 ‘아, 이 비계좌는 이 자의 것이고, 저 비계좌는 저 자의 것이구나’하고 알 수 있었다. 비계좌의 실소유주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주 점잖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비계좌가 노출되면 그들은 180도 표변해서 악착같이 수사 중지를 요구한다. 검찰총장이든 법무부장관이든 가리지 않고 압력을 넣는 것이다.”
수사 의지 꺾어온 방패 ‘인사 조처’

동화은행 비자금 수사에서 함검사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계좌도 발견했다. 이에 대해 그는 “이현우씨 비계좌를 발견하자 그 뒤에 더 큰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계좌였다. 이현우씨 비계좌가 인계철선이라면 노 전대통령의 비계좌는 인계철선과 연결된 핵폭탄이었다. 이현우씨를 잡아넣으면 핵폭탄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아무리 담이 큰 실력자라도 검찰에 당장 수사를 중지하라고 지시하지는 못한다. “검찰이 증거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조사하고 있는데 그럴 수 있느냐”는 식으로 빙빙 돌려서 압력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때 수사 검사의 안테나는 검찰 상층부와 청와대의 의지를 감지하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다. 검찰 상층부가 외압을 막아줄 의사가 없으면 수사는 중단되고 마는 것이다.

이 무렵 각 언론은 ‘청와대 김영수 민정수석이 동화은행 사건 수사에 대해 “물증 없이 수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함변호사는 “비계좌를 발견하고 은행원의 진술을 확보했는데 물증이 없다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다. 수사를 중단시킬 묘안이 없으니까 ‘물증 어쩌고’하며 사실상 수사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임 검사의 수사 의지를 꺾는 최고의 방법은 인사 조처이다. 검찰총장은 함검사를 불러 승진시켜 줄 테니 수사를 중단하라고 회유했다. 얼마 후 함검사는 동화은행 사건 주임 검사에서 물러나고, 이 사건은 안영모 행장 등 몇 사람만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그 후 함검사는 서산지청장이라는 관리직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더 이상 수사 검사를 하지 말라는 인사 조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함변호사는 사표를 던지고 변호사로 변신했다.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수사가 마무리될 즈음 서울지검 강력부 홍준표 검사가 주도해 시작된 슬롯 머신 사건 수사는 슬롯 머신 업주와 정치인·검찰·경찰·안기부 간부 간의 유착을 밝혀낸 대형 수사였다. 홍검사가 슬롯 머신 업계를 수사할 수 있었던 것은 89년부터 모아온 내사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

89년 홍검사는 정덕진씨의 맏형인 정덕중씨가 13대 대통령 선거 때 노태우 후보의 사조직인 태림회에 2백억원을 제공했다는 소문을 듣고 슬롯 머신 업계를 출입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10만원권 수표를 잃어 주고 이 수표가 어디로 가는지 추적해 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슬롯 머신 업계의 현금 동원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검은돈이, 이 곳에 모인 헌 수표와 교환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세탁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또 검찰·경찰의 고위 간부와 김태촌을 비롯한 폭력 조직이 정덕진씨 형제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사실도 확인했다.
선배 검사 구속한 ‘읍참마속’도 무위로

89년 말 홍검사는 정씨 형제의 로비력을 떠보기 위해 이들에 대한 정보를 안기부에 흘렸다. 89년 11월 안기부의 조사가 시작되었으나 정덕진씨는 엄삼탁 안기부장 특보에게 뇌물을 씀으로써 90년 3월 내사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대검 형사부도 정덕진씨 비리 혐의에 대한 내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씨 형제는 대검에 있던 이건개 검사장에게 뇌물을 써서 빠져 나오는 데 성공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홍변호사는 “안기부와 대검의 내사를 빠져나간 정덕진씨인지라 그의 배후 세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씨 형제를 수사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93년 김영삼 문민 정부가 출범하고 사정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때야말로 정덕진씨를 수사할 절호의 기회라는 판단이 들었다. 정덕진씨의 비리를 밝히되 정씨 비호 세력을 척결하는 것을 수사 목표로 삼았다”고 말했다.

정덕진씨 수사의 클라이맥스는 이건개 대전고검장의 수뢰 사실을 밝힐 때였다. 이건개 고검장은 정덕진씨의 동생 정덕일씨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가 있었다. 수사 기법상 정덕진·정덕일 형제를 모두 구속하면 이고검장이 수뢰한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홍검사는, 정덕일씨를 불구속 처리했다. 그가 이런 판단을 내린 데는, 형제·부모·부부는 동시에 구속하지 않는다는 검찰 관례를 원용한 측면도 있었다.

정덕일씨를 불구속 입건한 것이 곧 이건개 고검장의 구속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당시 검찰총장은 정덕일씨를 구속하라는 직무 명령을 내렸다. 직무 명령을 받은 검사는 무조건 이 명령을 시행해야 한다. 직무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즉각 징계 조처가 내려진다.

“정덕일씨를 구속하면 이건개 고검장을 구속할 수 없게 될 판이었다. 이런 판국에 송종의 서울지검장 앞으로 검찰총장의 직무 명령이 날아들었으니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들은 검찰총장의 직무 명령에 대해 사표를 내겠다는 것으로 맞섰다. 그래서 이 명령이 취소된 것으로 알고 있다.” 홍변호사의 말이다.

홍검사가 검찰총장의 직무 명령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언론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데 근본 원인이 있다. 홍검사는, 내부 보안을 중시하는 스타일의 함승희 검사가 동화은행 비자금 수사 때 언론과의 접촉을 일정한 선 이하로 유지하다가 위로부터 압력을 받자 고립무원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홍검사는 언론을 등에 업고 검찰 고위층의 압력을 물리쳤지만, 그 대가로 조직을 해쳤다는 혹독한 내부 비판을 받았다. 검찰권 독립 차원에서는 함승희 검사보다 한 발짝 더 나가는 데 성공했지만, 그 역시 슬롯 머신 사건 수사 후 안기부로 파견되었다가 지난 9월 검찰을 떠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93년 여름 불거져 나온 (주)한양 배종렬 회장 사건과 육군 상무대 이전 공사를 둘러싼 조기현 청우건설 회장 사건 역시 기업 비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었음을 보여주는 대형 비리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이나 슬롯 머신 사건처럼 검찰이 인지해 드러난 수사 사건이 아니었다. 배종렬 회장 사건은 한양노조가 그의 비리를 수집한 결과 드러났고, 조기현 회장 건은 그의 동업자였던 이동영 대로건설 사장 등이 작성한 투서로 인해 터져 나온 경우였다.

검찰이 인지해 수사를 시작한 사건은 수사의 주체가 확실한 만큼, 외압에 대해 어느 정도 맞선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외부에서 터져 나와 검찰로 이첩된 사건은 임자 없는 수사로, 외압에 쉽게 굴복한다는 약점이 있다. 서울지검은 (주)한양이 노사 분규를 겪는 과정에서 배회장의 비리 사건이 터져 나왔다는 이유로 특수부가 아닌 공안부에 이 사건을 배당했다.

공안부 ㄱ검사는 배회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계좌를 12개 발견하고, 그 비계좌를 통해 조성된 비자금 85억원 중 20억∼30억원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ㄱ검사는 배회장의 비자금 사용처에 대해서는 공소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그가 내건 명분은 ‘정치 자금은 수사하지 않는다’는 검찰 내부의 불문율이었다.

조기현 청우건설 회장에 대한 고발장을 처음 배정 받은 이는 서울지검 형사부 ㄱ검사였다. 이 고발장에는 조회장이 군·정·관계 실력자에게 전달하겠다는 명목으로 이동영 사장으로부터 받아간 금액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ㄱ검사는 조회장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에 불복한 이동영 사장이 서울고검에 항고하자 서울고검 ㅅ검사가 ㄱ검사에게 재수사 명령을 내렸다. 상무대 사건은 서울지검과 고검을 오가는 과정에서 언론에 알려져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된 경우였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일부 군관계자만 처벌되었을 뿐 정치권 인사에 대해서는 수사조차 되지 않은 채 넘어가고 말았다.

올해 5월 대검 중수부 김성호 부장검사가, 이형구 노동부장관이 산업은행 총재 시절 시설자금을 대출해 주고 기업체로부터 2억원을 받은 혐의를 찾아내 구속한 것은 광복 후 최초의 현역 장관 구속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김성호 부장검사는 덕산그룹 박성섭 회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형구 장관의 수뢰 혐의를 포착해 이같은 개가를 올렸다고 한다.

현역 장관 구속을 부른 박성섭 회장의 수첩에는 박회장이 1천만∼3천만원씩을 준 정치인 명단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처사촌인 손성훈씨가 수뢰 혐의로 수사 받은 것도 박성섭 리스트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검은 박성섭 리스트에 지적된 정치인들이 돈을 받은 후 영수증을 발급했으므로 문제삼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고위 공직자에 대해서는 과감히 사정의 칼날을 들이민 검찰이지만 정치인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 ‘생선(정치 자금)을 먹을 때는 가시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로 더욱 유명해진 김상현 의원 수뢰 혐의 사건도 이런 경우이다. 이 사건은 사기 혐의로 기소된 김문찬 대호원양 대표가 “박승주 전 범양상선 회장으로부터 백억원을 받아 정치인 등 50여 명에게 로비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한 것이 단서가 되었다. 94년 7월 서울지검 특수부는 민주당 김상현 의원이 대호원양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를 잡고 김의원을 소환 조사까지 했으나, ‘대호원양으로부터 조건 없이 빌린 돈’이라는 김의원 주장을 듣는 선에서 수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상무대 사건의 단서가 된 이동영 대로건설 사장의 투서에는 조기현 회장이 김윤환 의원과 군·관계 고위 인사에게 전달하겠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아갔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검찰은 군관계자에 대해서는 수사에 착수했으나 김윤환 의원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 역시 ‘정치 자금은 수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람 보지 말고 증거만 보고 가라’

정치권을 배제한 검찰의 사정은 정치 격변기마다 검찰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61년 5·16 쿠데타 직후 박정희 소장은 장교들로 구성된 혁명검찰부를 만들어 전(前) 정권의 부정부패를 단죄했다. 79년 12·12 사건으로 등장한 전두환 소장 역시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어 사법권을 행사했다. 국민 직선으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마저 임기 중반기에 특명사정반을 만들어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다. 김영삼 문민 정부 역시 출범 초기에 감사원 주도로 사정을 했다.

혁명검찰부·사회정화위원회·특명사정반은 법적인 근거가 없는 기관이지만 그 힘은 가히 초법적이었다. 감사원은 직무·회계 감찰을 주임무로 하는 곳인데 비리 감찰까지 맡았다. 이 당시 검찰은 겨우 기소권만 행사하는 거수기로 전락했다. 이처럼 정치 격변기 때마다 검찰이 위축되었던 것도 검찰로 하여금 정치권의 눈치를 보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법조인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자주 언급해서 더욱 유명해진 말이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다. 이 말대로 우리 사회는 법보다 권력이 높은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이 법의 통제를 받아야만 진정한 근대 국가다.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해야 한다. 구린 돈을 받고도 정치인이 정치 자금으로 받았다고 주장하면 무조건 면죄부가 발행되는 풍토 속에서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없다”라고 말했다.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다루기 위해 한국 검찰은 대검에 중앙수사부를, 서울지검을 비롯한 8개 지검과 서울지검 동부지청 등 5개 지청에 특별수사부를 두고 있다. 이렇게 많은 특별수사부를 갖고도 한국 검찰은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외면하고 있다. 반면 일본 검찰은 도쿄지검과 오사카지검 두 군데에만 특수부를 설치해 놓고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다나카와 가네마루 신 구속 이후 도쿄지검 특수부는 정경 유착을 끊어내는 것을 최대의 수사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기 위해 도쿄지검 특수부 검사들은 정치인·기업인을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점심 식사도 싸들고 온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회식도 사무실에서 맥주 파티를 여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한다. 이들은 청렴 강직하다는 것을 무기로 정경 유착에 도전하는 것이다.” 서울지검 한 검사의 말이다.

‘사람을 보지 말고 증거만 보고 가라’는 것은 정경 유착을 파헤치는 수사의 기본 조건이다. ‘이 피의자는 막강한 정치력을 갖고 있다’ ‘이 피의자는 자금 동원력이 대단한 기업인이다’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검사의 수사는 실패하고 만다.

노씨 비자금 파문은 국민 여론을 등에 업고 검찰이 정경 유착의 검은 고리를 끊을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 위해서는 김기수 검찰총장과 안강민 중수부장 등 검찰 수뇌부가 정치권의 외압을 차단할 수 있어야만 한다. 문영호 중수2과장·김성호 특수3부장·김진태 대검 연구관 등 핵심 수사 실무자는 철저히 증거만 보고 나가야 한다. ‘과연 검찰이 정치권의 부패에 메스를 들이밀 수 있느냐.’ 노씨 비자금 사건이 검찰에 던져준 진정한 과제는 검찰권의 독립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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