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집짓기 운동' 삐그덕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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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비타트운동본부 간사 25명 파업…
'정치화·관변단체화로 거부한다'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빨간불이 켜졌다. 이 운동을 주관하고 있는 한국 해비타트 운동본부(정식 명칭은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연합회'·이사장 정근모)의 실무 간사 25명이 최근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며 16일간(3월 6∼21일) 파업을 벌였다. 파업에 가담한 상당수는 3월 안으로 조직을 떠날 전망이다.

올해는 한국 해비타트 운동에 매우 중요한 해이다. 국제 해비타트 운동이 25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이 '지미 카터 특별 건축 사업' 선정지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시사저널> 제594호 참조). 한국 해비타트는 이에 따라 오는 8월 5∼12일 주 건축지인 충남 아산을 비롯해 경기도 파주·강원도 태백·경북 경산·경남 진주에 집 1백20채를 지을 계획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해비타트 운동에 참여해 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이 기간에 한국을 방문해 자원 봉사자 6천여 명(해외 봉사자 1천5백여 명)과 함께 직접 망치와 못을 들고 집 짓기에 나설 예정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내홍이 불거진 것이다.


사업지 변경 과정에 의혹 제기


사진설명 논란 : 3월13일 결성된 국회 지부. ⓒ연합뉴스

파업에 참여한 실무 간사들은 한국 해비타트 운동본부가 정치화·관변단체화하고 있다는 데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다. 이들은 먼저 경기도 지역의 지미 카터 특별 건축 사업지가 오산에서 파주로 바뀌어 결정된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지회가 없는 지역에서의 사랑의 집짓기는 해비타트 원칙에 명확히 위배된다. 먼저 지회를 결성하고, 그 공동체 정신으로 집을 지어가는 것이 해비타트의 정신을 구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파업 간사들에 따르면, 그런데도 정근모 이사장이 개인적 친분이 있는 국회의원 ㄱ씨·ㅇ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회가 없는 파주로 사업지를 옮긴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참여를 무조건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업지 선정 과정에서부터 정치적 입김이 개입했다는 것은 해비타트의 본래 취지와 크게 어긋난다"라는 것이 파업에 참여한 홍종락 팀장의 지적이다. 이에 대해 당사자로 거론된 ㄱ의원측은 파주를 추천한 사실을 시인했다. 단 이는 유력한 예정지였던 오산에서의 집짓기 가능성이 불투명해지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해비타트를 돕기 위한 것이었지, 정치적인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해명이다.

정이사장 또한 파업 간사들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오산이 부지 구입과 지회 운영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기 때문에 사업지를 변경한 것뿐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파주에서 유력한 사업지로 거론되는 곳이 통일대교 북단 1km 지점의 통일촌 인접지(파주군 군내면 백연리)라는 사실이다. 민족 화합을 지향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고려해 이 지역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 파주시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곳은 민간인 출입 통제 지역이어서 거주민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다. 일자리 또한 거의 없다. 출입농을 제외하면 거주민의 생계 대책이 사실상 막연하다고 파주시 관계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지역에 거주촌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자활 공동체'를 지향하는 해비타트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라고 파업 간사들은 주장하고 있다. 해비타트 창시자이자 국제 해비타트 총재인 밀라드 풀러는 해비타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적선을 베푸는 운동이 아니라고 역설해 왔다. 해비타트는 집 없는 사람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스스로 일어서게 하는 자활 프로그램이다. 해비타트에 입주하는 사람은 입주하기 전까지 5백 시간 이상 스스로 집을 짓는 데 땀을 쏟아야 하며, 건축 원가를 15년 동안 분할 상환해야 한다. 그런데 생계가 불투명한 지역에 거주민을 던져 놓는 것은 전시 효과를 노린 '정치 쇼'에 불과하다는 것이 파업 간사들의 주장이다.

간사들이 제기하는 또 한 가지 비판은 한국 해비타트 운동본부가 관변단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민간 단체가 관으로부터 행정적·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해비타트 일부 지회의 관 의존도는 위험 수준이라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한 예로 오는 8월 충남 아산에서 집 72채를 지을 계획인 해비타트 천안·아산 지회가 작성해 시·도에 제출한 '도청 및 시청 지원 협력 사항'에는 서른한 가지 지원 내용이 명기되어 있다. 여기에는 해비타트측이 모금을 위해 기업 및 기관을 방문할 때 도지사·시장의 협조 공문을 첨부하도록 해 달라는 '기업체 홍보 및 모금 협력 요청', 시 위생과가 숙박 예정 업소를 미리 방문해 행사 당일 숙박료를 2천∼3천 원으로 할인할 수 있게 협조해 달라는 '숙박료 할인 협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충남도와 아산시는 이에 따라 예산 19억6천여만원을 배정해 집행 중이며, 유관 부서를 중심으로 '지미 카터 특별 건축사업 지원 전담반'도 구성했다. 그러나 해비타트가 행사 그 자체를 위해 직접적인 재정 지원을 요청한 일은 없다고 운동본부 최성락 이사는 잘라 말했다. 시·도가 배정한 예산 또한 인접 도로 건설, 보도 조성 공사, 가로등·신호등 설치처럼 인프라 구축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며, 부지 선정에서 건축 허가까지 해비타트 사업에서 관의 도움은 현실적으로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해비타트의 사업 방식은 이미 정도를 벗어났다고 최근 이 조직을 떠난 한 핵심 간부는 반박했다. 아산에서처럼 해비타트가 처음부터 관과 결탁하면 사업은 매끄럽게 진행될지 모르나 입주민이 이를 관이 베푼 시혜 정도로 여겨 주택 자금을 상환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그렇게 되면 새마을 운동이나 해비타트 운동이나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특정 간부 사욕 채우는 수단 되었다"


사진설명 '초심(初心)으로' : 일부 이사진의 개인적 야욕과 오판 때문에 '사랑의 집짓기' 운동의 순수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시사저널 윤무영

이번에 파업에 참여한 간사들은 해비타트 운동이 특정 간부의 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들은 정근모 이사장이 지난해 호서대 총장으로 취임한 뒤 지미 카터 특별 사업의 최대 현장이 이 학교 인근으로 결정 난 것에 대해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다.

특히 호서대 ㄴ교수가 지난해 11월 작성했다는 문서(<해비타트 사업이 호서대 발전에 미치는 영향>)가 발견되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호서대의 일부 인적·물적 에너지가 한시적으로 해비타트 사업에 할애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호서대 발전에 순기능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제한 이 문서는 △총장을 비롯한 해비타트 활동 교수의 언론 매체 출연에 따른 호서대 홍보 효과 △호서대 구성원의 소속감 및 유대감 고취 △호서대 주변의 정비 및 개발로 인한 지역 발전 등을 대표적인 순기능으로 꼽았다.

이에 대한 정근모 이사장의 직접적인 해명은 들을 수 없었다. 미국에 가 있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변을 대신한 최성락 이사는 당시 도시계획·건축학 전문가들이 참여한 부지선정위원회가 입지 여건과 상징적 의미 등을 충분히 검토한 끝에 아산을 선택했으며, 이에 대해 비전문가인 간사진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일종의 월권 행위라고 못박았다.

한국 해비타트는 중앙에 강력한 본부가 먼저 생긴 다음 지방으로 지회가 확산된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해비타트는 그 어느 곳보다 효율적인 조직 운영을 자랑해 왔다. 그렇지만 효율성 제고가 민간 단체(NGO)의 궁극적인 목표일 수는 없다. 해비타트가 생산성 극대화를 명분 삼아 정·관·기업과 '무원칙한 거래'를 계속하면 소박하게나마 나눔을 실천하고 싶던 이들은 사랑의 집짓기로부터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파업에 참가했던 한 간사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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