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務實 외교’로 국제 무대에서 펄펄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1997.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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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경제력 무기 삼아 ‘務實 외교’ 공세
‘무실(務實) 외교에 박차를 가하라.’ 언젠가 대만의 李登輝 총통이 금문도를 비롯해 중국 본토와 가까운 일선 도서의 방위망을 순시하면서 힘주어 강조한 말이다. 즉 대만이 본토와 통일되기 전에 반드시‘국제 활동 공간’을 개척해야 하므로, 실용적인 외교 노선인‘무실 외교’를 적극 펼치라는 것이다.

97년 벽두부터 이총통이 천명한 대만의 무실 외교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같은 외교 공세는 특히 튼튼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주로 중남미와 아프리카 저개발국에 파고들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지난 1월12일 章孝嚴 외교부장은 20일 동안 중남미와 함께 대만 외교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아프리카를 방문했다. 그는 스와질랜드를 시작으로 감비아·기니비사우·세네갈·부르키나 파소·남아프리카공화국을 순방했다. 특히 1월19일 그가 이틀간 방문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오는 12월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다고 선언했기에 큰 관심을 끌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장외교부장이 아프리카 순방 외교에 나선 것과 때를 같이해 중국의 전기침(錢基琛) 외교부장도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적도 기니·상 투메 프린시페·카보베르데·모리타니를 방문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 중국은 이들 나라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수 년 전부터 대만이 경제 원조를 내세워 이들 나라에 파고들어 아홉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자 중국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뒷북치기 외교’에 나선 것이다.

대만의 連戰 부총통 겸 행정원장도 지난 1월 중순 바티칸을 방문한 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를 전격 방문했다. 두 나라는 중국과 수교한 나라들이다. 그뿐인가. 대만 국민당은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1월20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 吳伯雄 비서장을 단장으로 하는 비공식 대표단을 파견했다. 다음 달에는 정책 최고 결정 기구인 대륙위원회 주임을 지낸 숙만장(肅萬長) 의원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미국에 파견해 영향력 있는 미국 인사들과 조찬 기도 모임을 연다는 방침이다.

중국, 맞불 작전 짜느라 골머리

현재 대만의 주외교 무대는 중남미와 아프리카에 국한해 있지만, 올해부터는 경제 원조가 필요한 곳이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크게 확대할 전망이다. 근래 자본주의를 도입한 뒤로 경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러시아에 대해 수십억 달러 투자를 결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처럼 대만이 냉전 후 전면적인 외교 공세를 펼치는 것은 경제를 축으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국제 질서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정치·안보 동맹 관계가 큰 영향을 미치던 냉전 질서가 막을 내리면서 모든 나라들이 경제적 이해 관계에 따라 실용 외교 노선을 펼치는 시대가 되자, 막강한 경제력을 갖춘 대만이 물 만난 고기처럼 국제 외교 무대에서 보폭을 넓혀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만의 외교 공세에 맞서 중국은 전세계에 기회 있을 때마다 ‘하나의 중국’원칙을 천명하면서 맞불 외교 작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대만의 외환 보유고는 약 9백80억달러로 약 1천9백억달러를 보유한 일본에 이어 세계 제2위이다. 대만은 이처럼 든든한 부를 바탕으로 각종 경제 원조를 내세워 주로 저개발 국가들을 공략해 현재 29개국과 공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그밖에 대만은 한국·미국·일본 등 많은 나라들과 준외교 공관 격인 무역대표소 또는 교류협회 등을 개설해 놓고 있다. 얼마전 대만이 비밀리에 북한에 핵쓰레기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은 것에도 궁극적으로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노린 정치적 계산이 깔렸다고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80쪽 상자 기사 참조).

물론 대만의 외교 공세는 대만을 본토의 일개 성(省)으로 간주하고 있는 중국의 공개적인 반발 때문에 순탄하지만은 않다. 중국은 대만이 관계 개선의 손길을 뻗치는 나라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강력히 반발해 왔다. 가장 최근의 예로 대만이 북한에 핵쓰레기를 수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이를 국가 간의 거래로 간주해 강력히 경고하고 나선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대만은 주로 경제 실리라는 당근책을 제시하며 외교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경제 논리가 특히 잘 통하는 곳이 바로 군사 부문인데, 국가 안보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는 대만은 첨단 무기를 구입하는 데 천문학적인 돈을 퍼붓고 있다. 대만의 올해 국방비 예산은 96년보다 3.8% 증가한 93억달러이며, 전체 예산의 21%에 이른다.

특히 냉전이 끝난 이래 대만의 주요 무기구입처로 프랑스가 떠오른 것은 흥미롭다. 대만은 91년 프랑스로부터 총 30억달러어치에 해당하는 프리깃함 6척을 주문했다. 또 숙원 사업으로 추진하던 F 16 전투기 구입이 중국의 반발을 의식한 미국 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진척되지 않자 구입선을 프랑스로 바꾸어 미라주 2000-5 전투기 60대를 주문하기도 했다. 그밖에 프랑스는 사정 거리가 3㎞인 미스트랄 미사일 5백50기를 대만에 판매할 방침이다. 프랑스는 대만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중국과 해놓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경제적 실리 앞에서 프랑스의 이런 약속은 사실상 휴지조각이 된 셈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대만의 최대 후원 세력은 미국이다. 70년대 중반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 미국은 이른바‘대만관계법’을 제정해 유사시 대만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다. 미국의 군수업체들은 최대 고객 중의 하나인 대만에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과의 외교 마찰을 의식한 미국 정부가 번번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애만 태우고 있다. 다만 대만이 일찍이 발주한 F 16 전투기 1백50대 구매에 대해서는 엄청난 구매액을 감안해 미국 정부가 최종 결론을 유보한 상태이다. 대만은 그러나 91년 걸프전 때 우수한 성능이 입증되어 1백60대나 주문한 M60A3 탱크(대당 55만달러)는 차질 없이 인도 받을 예정이다. 미국 조야의 거미줄 인맥이 뒷심

외교 전문가들은 대만이 그나마 국제 외교 무대에서 나름의 활동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까닭을 대미 로비가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난해 3월 대만의 총통 직선 선거일을 앞두고 중국이 무력 시위를 벌였을 때 친대만 의원이 득실득실한 미국 하원이 미국의 군사 개입을 촉구한 것은 대만의 실리 외교가 얼마나 성공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였다. 또 95년 6월 이등휘 총통이 모교인 코넬 대학을 방문하기 위해 비자를 신청했을 때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비자가 발급된 것은 바로 의회내 친대만 로비스트들 덕분이었다.

미국에 대한 대만의 로비력은 이스라엘 다음으로 막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미국내 친대만 로비 회사는 줄잡아 30개로, 10개에 불과한 중국을 압도한다. 지난 2년 동안 대만이 로비 자금으로 푼 돈은 38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특히 대만은 94년 초 민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캐시디 & 어소시에이츠사와 연간 1백50만달러씩 3년간 계약을 체결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법무부에 등록한 친대만 로비스트 가운데는 마틴 루소 전 하원의원, 스티브 심스 전 상원의원, 프랭크 파렌코프 전 공화당 전국위원회위원장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밖에 의정 수행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의원 보좌관과 전직 국무부 및 재무부 관리 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만은 미국내 13개 지역에 로비를 위한 공식 연락사무소를 두고 있을 정도로 대미 로비에 열심인데, 주미 대만대표부는 지난 10년 동안 수백 명에 이르는 영향력 있는 미국 인사들을 초청해 친대만 인맥을 끈끈히 구축해 왔다. 클린턴 대통령도 아칸소 주지사 시절 네 번이나 대만을 다녀갔을 정도다.

대만이 현재 가장 바라는 것은 유엔에 가입하는 일이다. 유엔에 가입하기만 하면 국제 사회로부터 떳떳하게 주권 국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은 물론 중국의 무력 위협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있다. 냉전 시절에 대만은 감히 유엔 가입을 시도하려 꿈꾸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냉전 종식 후 신데탕트 기류에 고무된 대만은 93년부터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20여 친대만 국가들을 동원해 대만 유엔가입안을 총회 의제로 채택시키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대만은 지난해 9월 제51차 유엔 총회 개막에 때맞춰 백명 규모의 유엔 가입 홍보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 대만은 각국의 분담금 체납으로 말미암아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유엔에 16만달러를 전달하기도 했다. 특히 대만은 유엔 가입을 위해서라면 10억달러도 내놓을 수 있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거듭된 유엔 가입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자 대만 정부는 공식·비공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각종 국제 기구에 더 적극 참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즉 안으로는 국방력을 더욱 튼튼히 하면서 통일에 대비하고, 밖으로는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안보 외교보다는 통상 외교를 통해 최대의 실익을 챙기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일부 외교 전문가들은 돈을 무기로 외교를 사려는 듯한 대만의 무차별적 경제 외교가‘자국 이기주의’로 빠지면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대만이 경제 파탄 위기에 직면한 북한에 대해, 북한으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2억2천만달러를 지불하고 핵쓰레기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은 것에 대해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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