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뻔한 소설''이 대중 사로잡는 이유
  • 성우제 기자 ()
  • 승인 2000.10.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설 <가시고기> <코리아닷컴> <올인>에 비평은 냉담, 독자는 환호…“문학 저변 확대에 큰 힘 될 것”
출판계는 지난 여름을 지나오면서 독특한 양극화 현상을 경험했다. 한쪽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위기라는 말이 익숙해지고, 다른 한쪽은 신드롬 따위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 양극화 현상이 문학이라는 한 장르 안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올 상반기에 순문학·본격 문학이라 불리는 서적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폭탄’들을 맞아 황석영씨의 <오래된 정원> 외에는 거의 빛을 보지 못했다. 반면 대중·통속 문학으로 분류되는 소설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대중 문학이 대중으로부터 열렬하게 환영받은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에는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두드러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올해 대중 문학 붐을 주도한 소설은 조창인씨의 <가시고기>(밝은세상)이다. 지난 1월에 나온 이 소설은 4월 이후 베스트 셀러 1위에 올라 9개월째 부동의 선두를 달려 지금까지 80여만부가 팔려나갔다. 올 출판계 최고의 히트 상품이다.

그 뒤를 김진명씨의 <코리아닷컴>(해냄), 노승일씨의 <올인>(들녘)이 이었다. 여름 시장을 겨냥해 나온 두 작품의 인기는 가을까지 이어져 쇄를 거듭하며 베스트 셀러로 각광받고 있다.

대중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유행가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끌지만,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이나 파장이 그 인기만큼 깊지 않다는 점이다. 이같은 성격 탓에 대중 문학은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작품을 분석하기보다는 그 작품이 잘 팔리는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게 하는 단서로 곧잘 인용되곤 한다.

<가시고기>는, 작가의 말처럼, 부성애라는 ‘너무나 빤하고 진부한’ 주제를 다루었다. 좋은 소설이라면 반드시 지니게 마련인 치밀한 구성과 아름다운 문체, 문제 의식과도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소설 미학 차원에서 보자면 별 재미가 없는 이 작품이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 까닭은, 요즘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하기 힘든 벅찬 감동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키리라고 짐작하지 못했다는 조창인씨는 자기 작품의 인기 비결이 “순문학이든 대중 문학이든 그동안 진부한 소재를 외면하고 너무 홀대한 데서 말미암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새롭고 실험적이고 독특한 소재를 찾다 보니 엽기적인 소재가 화제를 모으는 요즘, ‘너무나 당연하고 그럴듯한 이야기’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의 성향과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 상품성을 얻는 대중 문학의 공식은 <코리아닷컴>과 <올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코리아닷컴>이 내세우는 것은 김진명씨의 트레이드마크인 ‘국수주의’이다. 이번에는 인터넷을 장악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한국인 컴퓨터 천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4백만부가 넘는 대기록을 작성한 김진명씨는, 이번 소설에서도 속도감과 긴장감 넘치는 추리 기법을 적절히 활용해 대중을 매혹시켰다.
노승일씨의 <올인>은 바둑 기사이자 세계 정상의 도박사인 차민수라는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실명 소설이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바둑에 입문한 주인공이, 미국에서 거의 폐인이 되었다가 1년 수입 100만 달러가 넘는 승부사로 변신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그렸다. 독자들은 조훈현 서봉수 김 인 같은 바둑 기사들의 승부 세계와 더불어, 마약에 빠졌다가 그 세계를 탈출해 라스베이거스 최고의 도박사로 성장하는 주인공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며 소설 읽는 재미를 만끽한다.

“순수 문예 소설의 맹점은 바로 통속성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잘 팔리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만큼 감동적인 소설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적중했다.” 30년간 바둑 관전 기자로 활동하다가 <올인>으로 데뷔한 노승일씨의 말이다. 작가에 따르면, ‘실화’는 어떤 허구보다 사람을 흥분시킨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술 안주로 가장 많이 오르는 것도 그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으로 심금을 울리든, 한민족이 제일이라는 뿌듯한 자긍심을 안기든, 세계 정상에 오른 도박사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읽는 재미를 주든, 대중 문학은 분명한 공통점을 하나 지니고 있다. 고객인 독자에게 서비스하는 정신이 투철하다는 점이다.

1990년대 초 등장한 편의점에 소설책이 잡지·신문과 함께 들어가면서 신문 연재 소설로 대표되던 대중 문학은 전기를 맞았다. 소설책이 독자에게 위안과 오락 거리를 제공하는 상품으로 새롭게 포장된 것이다.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글쓰기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다. 본격 문학이 작가 의식을 앞세운다면, 대중 문학은 대중의 취향이 1차 고려 대상이다. “본격 문학과 대중 문학의 차이는 주제나 소재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방법에 있다”라고 조창인씨는 말했다. 조씨는 이른바 ‘평균 대중’의 눈높이에 글의 수준을 맞추었다. <가시고기>에는 본격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도의 상징성이나 정밀한 묘사가 보이지 않는다. 문장도 짧고 쉬울 뿐 아니라, 속도감이 느껴지는 문체를 채택했다.

소설의 대중성·상품성을 내세우는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이 진지한 비평 대상이 되지 않는 데 대해 ‘서운하지도 않고, 개의치도 않는다’고 말한다. “나도 순문학 애호가지만, 순문학은 소수 애호가와 작가 지망생에게 주로 읽힌다. 문학적 완성도와 상관없이 대중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대중 문학은 순문학과 길이 다르다”라고 노승일씨는 말했다.

대중 문학은 그동안 ‘저급 문학’으로 취급되어 왔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예술로서의 미적 가치보다는 상품으로서의 교환 가치를 중요시하는 장르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위기감을 더해가는 본격 문학과 달리 대중 문학이 ‘대박’을 터뜨리는 것은, 문학 평론가 정홍수씨가 지적한 대로, 본격 문학이 ‘기왕의 독자를 저쪽으로 밀어낸 탓’도 없지 않다. “이같은 경향을 보면 본격 문학 내부에서 반성할 부분도 있다”라고 정씨는 말했다.

‘인터넷 폭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대중 문학의 순기능 중 하나는, 최근의 <해리 포터>가 그랬던 것처럼 인쇄 매체에 등 돌린 ‘고객’을 돌려앉히는 역할이다.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문학 평론가 김창식씨는 <대중 문학을 넘어서>라는 유고집에서 “대중 문학은 문학의 질적 하락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독서 인구를 개발함으로써 문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