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아니메 태풍'' 비상
  • 魯順同 기자 ()
  • 승인 2000.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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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개혁 시민연대 공청회/“3차 개방은 한·일 투자협정 위한 카펫 깔기”
일단 빗장이 풀리면, 그 문이 얼마나 열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본 대중 문화가 꼭 그 모양이다. 2년 전만 해도 된다 안된다 말이 많았지만 이제는 별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최근 문화관광부가 전격적으로 3차 개방 방침을 발표했고 그 폭이 완전 개방에 가깝다 해도 예정된 순서일 뿐이라는 반응이 주류다. 당국이 빗장을 풀든 말든 거리에는 이미 일제 노래와 패션, 캐릭터 상품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장의 위기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한·일 관계를 반일과 극일, 혹은 교류라는 추상적인 틀로 보면 일본 대중 문화 개방은 이미 종결된 사안이지만 현장에서는 ‘이제부터 전면전’이라고 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지난 7월10일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문화연대·대표 김정헌)’는 일본 문화 3차 개방에 대한 공청회를 마련했다.

이들은 일단 화살을 정부로 돌린다. 1,2차 개방의 파급력이 별 것 아니라고 평가하고 개방의 폭과 일정을 지나치게 가파르게 잡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화계를 만만하게 보고 ‘한·일 투자협정의 카펫’으로 삼는 것이 아니냐는 혐의까지 보태고 있다. 이종회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은 “정부는 올해 안에 한·일 투자협정을 맺으려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문화 보호책을 투자 협정의 걸림돌쯤으로 보는 정부의 태도는, 프랑스가 다자간 무역협정을 논의할 때마다 문화 부문에 예외를 주장해 협상이 결렬되곤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영화인회의 관계자는 문화관광부가 일본 문화 개방의 여파를 축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지원 장관이 3차 개방 방침을 발표하면서 일본 영화 점유율에 관한 최근 통계를 무시하고 1월 통계치인 5%를 제시하면서 ‘파급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고 말했다는 것이다. 5월 현재 일본 영화 점유율은 10.6%이다. 1998년 0.3%, 1999년 3%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가파른 상승세다(89쪽 상자 기사 참조). 민간 연구자로서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이 주관하는 ‘개방 정책 심사분석 최종 보고서’ 작업에 참여했던 김휴종 박사는(삼성경제연구소), 5월 말 현재 일본 영화 점유율이 10.6%에 이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상반기 일본 영화가 흥행에 호조를 보인 것은 ‘초기 충격’ 효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거품이 빠지면 7~10% 수준에서 점유율이 안정되리라는 것이다.

문광부가 개방 폭을 넓게 잡은 데에는 근거가 있다. 당장 한국이 받을 타격과, 일본 시장에 진출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을 서로 견주어 볼 때 개방 속도를 빨리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판단이다. 일본의 대중 문화 시장이 한국의 6~10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한국문화정책 개발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영화의 경우 1999년 현재 일본 시장 규모는 1천8백28억 엔으로 한국 영화가 점유율을 0.3% 정도만 차지하면 일본 영화 개방으로 인한 한국 영화 수익 감소 최대치인 50억 원을 메우고 남는다. 비디오의 경우 0.7%, 음반은 0.2%가 되면 개방에 따른 경제적 피해가 상쇄된다는 것이다. 문화부는 영화 <쉬리>, 그룹 SES, <난타> 등의 예를 들면서 적극적인 대일 마케팅을 주문하고 있다. 국내 문화산업 지원은 지지부진

문화연대의 우려는 크게 두 가지다. 당국이 한 ·일 투자협정이라는 외부 변수 탓에 지나친 낙관론을 펴고 있으며, 개방을 결정할 때 약속했던 지원책이 지지부진하다는 점이다. 개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국 문화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원하는 정책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당국이 모르고 있어 문제라는 것이다.

당국이 보기에 억울할 수도 있다. 개방 방침을 결정하면서 다양한 지원책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제도를 정비했고, 종자돈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문화연대에 따르면, 우선 정부가 지난해부터 조성하겠다고 발표한 영화진흥기금 천억 원이 아직 조성되고 있지 않다. 분기 별로 지급되어야 할 진흥기금이 2분기가 지났지만 영화진흥위원회로 입금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2003년까지 새로 문화산업기금 5천억 원을 조성하겠다고 했지만 현재까지 만들어진 기금은 5백70억 원에 불과하다(문화정책개발원 보고서에 따르면 5백40억 원).

기금 운영이 대부분 돈을 되돌려받는 융자 형식(흥행 결과에 상관없이 갚아야 하는 돈)이어서 적극적인 투자를 바라는 현장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줄곧 지적되어 왔다. 통합방송법에 따라 의무화한 한국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방송 할당 비율이 최소한으로 운영되는 것도, 당국의 지원책이 생색 내기용일 뿐이라는 비판의 근거가 되고 있다. 현실이 이런 마당에 원론 수준에서 3차 개방의 긍정적인 효과를 되풀이 강조하는 것은 안이하다는 것이다.

특히 극장용 애니메이션 개방은, 이제 겨우 싹을 틔우고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을 고사시키기에 충분한 고엽제로 지목된다. 그동안 불법 비디오로 일본산 애니메이션을 보아야 했던 관객 처지에서는 대형 스크린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호사를 기꺼워할 테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한국 애니메이터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깊다.

방송 개방에 따른 우려도 심각하다. 이번에 개방된 장르는 스포츠 보도 다큐멘터리 부문인데, 문제는 다큐멘터리다. 최영묵 방송정책개발원 기획팀장은 외주 프로덕션이 몰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방송사에 프로그램을 납품하는 외주 프러덕션이 다큐멘터리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수준 높은 일본 다큐멘터리가 개방되면 이들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방송사들의 이기심과 단견 때문에 국내 방송 프로그램의 외주 비율은 턱없이 낮다. 그나마 외주 업체가 경쟁력을 갖고 있던 분야가 외풍을 맞으면 쑥대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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