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젊은 예술가의 숨통‘무료 화랑’ 활짝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9.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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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공간 풀 등 잇달아 개관…창의력 뛰어난 작가 작품 전시
한국의 미술 대학들은 해마다 수천 명씩 ‘미술인’을 배출한다. 그러나 젊은 화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서울의 이른바 명문 대학 출신이라고 해도 졸업생 가운데 작가로 활동하는 이는 많이 잡아야 10%이다.

화가의 꿈을 안고 어릴 적부터 열정을 불태워온 이들이 화단에 발을 들여놓기 직전에 붓을 꺾는 이유는, 열정이 식어서가 아니다.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들이 미술판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창의력을 받아줄 통로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 미술 제도에 절망하는 것이다.

이같은 열정과 절망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일까? 최근 창의력 있는 젊은 작가에게 길을 열어 주겠다는 ‘비영리 화랑’이 줄을 지어 탄생하고 있다.

지난 2월 서울 홍익대 앞에 ‘얼터너티브 스페이스 루프’(루프·02-3141-1377)가 개관한 것을 시작으로, 4월에는 서울 인사동에 ‘대안공간 풀’(풀·02-735-4805)이 생겨났으며, 오는 10월에는 인사동에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사루비아·02-733-0440)이 문을 연다. 비영리 화랑 개관 붐은 부산에까지 번져, 오는 9월1일 부산 광안리에 백 평 규모의 대안 공간(051-747-8853)이 들어설 예정이다.

‘도발적인 창작’ 환영

한국에 처음 등장한 대안 공간들은 말 그대로 ‘대안’과 ‘비상업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공공 미술관·상업 화랑으로 이분화한 기존 미술 제도에서 시들어 가는 젊은 열정을 키워 보겠다는 것이다.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도 ‘도발적인 창작’을 내보일 통로를 찾지 못해 활동을 포기해야 하는 수많은 젊은 작가에게 활동의 장을 열어 주겠다는 뜻이다.

사실 한국 화단은 젊은 미술학도에게 쉽사리 넘을 수 없는 높은 벽 같은 곳이다. ‘예술성만 뛰어나다면…’이라는 조건은 한국 화단에서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작업의 성격이 주류에 도전적이고 실험적일수록 그 벽은 더욱 높다.

국·공립 미술관이나 기업이 운영하는 사설 미술관 들이 ‘청년 작가展’ 형식으로 젊은 창의력을 수용한다고 하지만, 그 기회는 많지 않다. 거기에다 당장 눈앞의 성과에 급급해 하는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 있다.

기존 상업 화랑들은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감각에 눈을 돌릴 여유나 의지가 별로 없다. 미술 애호가층이 워낙 얇은 탓에, 유명세로든 작품 경향으로든 전국적으로 수백 명에 불과한 애호가의 입맛에 맞추지 않으면 화랑을 운영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장기적 안목을 갖고 가능성 있는 젊은 작가에게 투자해 ‘스타’ 또는 ‘상품’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몇몇 대형 화랑은 미술의 이미지를 활용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돈벌이 경쟁’에 몰두하는 것이 한국 미술 시장의 현주소이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더러 전시를 하더라도, 애호가들이나 상업 화랑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미술학도들의 상업 화랑 진출이 원천 봉쇄된 것만은 아니다. 이른바 대관 화랑을 활용하면 이력서에 올릴 수 있는 개인전을 얼마든지 열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을 1주일 빌리는 데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까지 드는 돈은,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화가들에게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대관료 외에도 작품 제작비·팜플렛 제작비·발송비 따위의 부담도 만만치 않다.
운영·후원, 미술인들이 도맡아

새로 출현하는 대안 공간들은 화가들의 이같은 부담을 모두 덜어 준다. 대안 공간들은 미술계에 고착화한 온갖 관행을 모두 털어 버렸다.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 ‘누구 제자인가’ ‘국전·공모전에서 몇번 상을 받았는가’ ‘그룹전·개인전을 몇번 열었는가’ ‘어떤 장르를 하는가’ ‘나이는 몇인가’ 따위 이력은 대안 공간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대안 공간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공간에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작가의 창의력 하나뿐이다. 대학 교수든, 대학 2년생이든 예술적으로 문제 제기만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이 공간에서 전시할 수 있다.

신선한 창의력말고도 대안 공간들이 내세우는 강점은 ‘표현의 자유’이다. 미술관이든 상업 화랑이든, 작가들이 그들의 문제 의식을 드러내는 데는 제약이 많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벽에 못 하나 박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고, 작품을 통해서든 퍼포먼스를 통해서든 자기를 마음껏 표현하는 데 자유로운 곳은 거의 없다. 대안 공간들은 작가들의 이같은 자기 표현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대안 공간들은 고착화한 미술계의 틀을 미술인 스스로 깨뜨리는 일종의 ‘미술 운동’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공간을 운영하는 이들이 미술인이며, 그들을 후원하는 이들도 미술인이다.

루프는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함께 공부한 박완철·서진석·송원선·신용식 씨가 참여해 문을 열었다. 임 산·홍성민 씨 등 젊은 미술인들이 큐레이터 혹은 기획 자문 역할을 하면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풀에는 권혁수 김용익 서용선 안규철 이영욱 정헌이 최진욱 홍명섭 씨 같은 중견 작가들이 운영위원을 맡았으며, 작가 황세준씨가 기획실장으로서 큐레이터를 하고 있다.

사루비아는 작가 윤동구·설원기 씨와 카이스갤러리(대표 유명분)가 힘을 모아 탄생시켰고, 카이스갤러리 김성희 기획실장이 수석 큐레이터 역할을 맡고 있다.

‘젊은 피’ 제대로 수혈해야 자리매김

아직 대안 공간의 이름을 정하지 못한 부산에서는 조현화랑이 전시 공간과 운영 경비를 지원하고 있다. 조현화랑 큐레이터 이영준씨와 작가 김성연씨,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이동석씨가 개관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젊은 미술가에게 숨통을 열어 주겠다는 대안 공간에는, 기획·운영을 하는 관계자뿐 아니라 기성 작가들이 적극적인 후원자로 참여하고 있다. 풀은 개관하기 직전인 3월 말에 <대안공간 풀 설립을 위한 기금 마련전>을 열었는데, 강요배 강운구 김정헌 주재환 씨 등 중견 작가들이 작품을 내놓았다. 사루비아 기금 마련전이 열리고 있는 카이스캘러리에도 이강소 박충흠 한만영 문 범 김차섭 안창홍 씨 등 40여 작가가 참여했다. “대안 공간의 필요성에 작가들 모두가 공감하기 때문에 작품으로 후원하는 것이다”라고 김성희 기획실장은 말했다.

신진 작가들의 등용문으로서 속속 문은 열지만, 대안 공간들의 앞날이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운영 자금이다. 미술인을 비롯한 후원자들을 모으고, 풀의 경우 정상화할 때까지 대관을 하고 있으며, 루프는 찻집 기능도 겸하지만, 대안 공간들의 가장 큰 고민은 언제까지 버티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세계 미술계를 호령하는 뉴욕의 경우, 미국의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지원을 한다. 그리고 각종 재단이 튼튼하게 뒷받침하고 있어, 비영리 갤러리가 미술 문화의 저수지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 신디 셔먼·제프 쿤스 등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세계적인 미술가는 거의 예외 없이 대안 공간 출신이다.

자금도 자금이지만, 대안 공간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참신한 대안을 내놓는가에 달려 있다. 부산에서 대안 공간을 준비하는 이영준씨는 “미대 졸업생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기 때문에 소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젊은 미술인에게 공간과 제도로써 창작 욕구를 어떻게 불러일으키며, 그 욕구를 어떻게 끌어 주는가 하는 게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미술 문화 활성화·대중화는 결국 ‘젊은 피’가 수혈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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