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90년대 문학과 작가의 위상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6.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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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해’ 맞아 진단한 90년대 문학과 작가의 위상
자동차나 대중 가요의 해는 제정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지원하지 않아도 자동차나 대중 가요는 시장 경제와 문화산업 논리에 의해 자기 증식을 거듭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연극 영화·국악·미술의 해에 이어 드디어 문학도 당국의 ‘엄호’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엄호는, 그러나 위기를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문학의 위기가 문학 내부가 아니라, 매우 역설적이게도 다름 아닌 당국에 의해 그 ‘허약함’이 인증된 것이다.

문학의 위기, 혹은 작가의 죽음은 90년대 들면서 문학 내부에서 전개되어 온 가장 치열한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리얼리즘과 자유주의로 대별되었던 80년대가 막을 내릴 즈음 한국 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터널’을 지나며 기우뚱거렸는데, 그 흔들림은 곧 문학의 위기로 명명되었다. 적이 사라지고 동시에 이념이 탈색되자, 문학(작가)의 팽팽했던 활시위는 풀어지고 말았다 .

정치권에서 ‘문민 시대’와 ‘세계화’가 외쳐지는 동안, 문학을 포함한 문화의 장에서는 문화산업 논리가 문화 논리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전통적 의미의 문화 장르와 그 위계는 급격하게 재편되었다. 문학으로만 한정하자면 대중 소설들이 출판·독서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아직 80년대의 여운을 어쩌지 못하던 작가들은 어느날 갑자기 자신들의 위치가 달라졌음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투사였고 사상가였으며 또 지식인이었던 문학(작가)을 거들떠보지 않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신 <소설 동의보감> <소설 토정비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비제도권 작가들의 소설이 잇따라 ‘슈퍼 베스트 셀러’로 떠올랐다. 본격 문학은 당황했다. 시청각 매체와 수시로 ‘업 그레이드’되는 뉴(멀티) 미디어를 타고 범람하는 대중 문화에 문학이 포위되고 만 것이다.

매체 환경의 대지진을 통과하며 주눅이 든 문학은, 한쪽에서는 대중에게로 돌아가자며 신세대 문학과 ‘영화 같은 소설’의 깃발을 올렸고, 또 다른 쪽에서는 신비주의나 후일담, 혹은 대하 역사소설, 추리소설 등을 향해 저마다 길을 틀었다. 시(시인)는 소설(가)보다 더욱 위축되었고, 문학 비평은 ‘비평가 자신들도 읽지 않는다’는 소리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최근 4~5년 사이에 문학과 작가의 자리는 이처럼 급격하게 추락했다.

“문학이 반드시 진지한 정신적 활동의 소산으로 창작된다거나 진정한 삶을 위한 사유 대상으로 수용된다고 자신있게 말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문학 평론가 김병익씨는 이미 이태 전 <동서문학>(가을호)에서 위와 같이 지적했다. 90년대 들면서 문학은 ‘창조 - 수용’에서 ‘생산 - 소비’ 차원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 문학사를 뒤적일 필요도 없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문학은 창조였고 작가는 창조자였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가’였으며 동시에, 혹은 작가이기 이전에 역사와 현실에 적극 저항·개입하는 선각자·지사·투사·사상가·혁명가·지식인이었다. 그러했던 문학이(작가가) 겨우 몇년 사이에 문학이 공격할 대상이던 권력으로부터 ‘보호’ 혹은 ‘지원’을 받아야 할 지경이 된 것이다.

창조와 생산 사이의 격차는 현격하다. 문학이 생산 - 소비 차원으로 이동하면 거개의 작가는 ‘창조적 전문직’ 혹은 ‘저술 노동자’라고 명함을 바꾸어야 한다. 김병익씨가 <문학은 이제 어떻게 생산, 소비되는가>에서 안타깝게 밝힌 것처럼, 작가는 이제 편집자·디자이너·카피라이터·마케팅 전문가와 같은 위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광복 이후 최대의 출판 불황으로 기록된 95년을 보내고 96년 ‘문학의 해’를 맞는 한국 문학(작가)의 고민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명함’ 문제다. 다시 찍어야 할 것인가, 옛날 명함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명함을 만들 것인가. 이 세 갈래 길 앞에 한국 작가들은 서 있는 것이다. 이 고민은 선택이 아니라 결단의 문제로 보이리만큼 심각하다.

물론 이미 스스로를 소설 상품의 스태프로 규정한 ‘선각’들도 있다. 만화 공장처럼 소설을 만들어내는 팀이 있다는 풍문이 나돈 지도 오래다. 본격 문학·제도권 문학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대중 스타’로 자리잡은 작가도 있다.
숲으로도 시장으로도 못가게 된 시인

문학의 역할, 작가의 위상에 대한 논의가 문학 내부의 논쟁으로 번진 것은 <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씨가 94년 (<상상> 봄호)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 글은 창조자로서의 작가를 부정하고, 소설다운 소설을 ‘만드는’ 작가를 강조했던 것이다. 이때 소설다운 소설은 대중이 얼마나 많이 찾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병익씨는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일시하고 ‘시장경제적 논리에 의해서만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문학 평론가 서영채씨는 최근에 낸 첫 평론집 <소설의 운명>에서 문화 논리와 문화 ‘산업’ 논리를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이인화씨의 주장을 반격했다. 서씨에 따르면, 이씨 발언의 문제는 문화 논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문화산업 논리를 필연성이 아니라 당위성으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서씨는 “중요한 것은 필연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문화산업 논리의) 존재 조건이 아니라, 그 안에서 힘들여 모색해야 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이다”라고 강조했다.

문화 논리와 문화산업 논리의 차이는 창조자와 생산자의 차이와 같다. <소설의 운명>에 따르면 문화의 논리는 부정의 정신, 총체성 회복을 지향하는 리얼리즘 정신에 뿌리를 두는 것이고, 반면 문화산업 논리는 우리의 일상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상품 생산 논리, 상품 미학(상품 디자인에서 유통과 소비에 이르는 전과정에서 구매욕을 증대시키는 것)의 ‘화려한 허무주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문학의 위기는 문화의 위기인 것이다.

시인(문학)은 숲(자연)으로도 가지 못하지만 시장(자본의 논리)으로도 가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90년대의 문학·문화 현실의 문제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문학 비평서 가운데 하나인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를 쓴 문학 평론가 도정일씨(경희대 영문과 교수)가 보기에, 문학의 위기는 시인·작가가 나태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또한 영상 문화 시대의 본격적인 대두와 극단적 상업주의가 진지한 문학에 대한 수요를 위축시켰기 때문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현대성이 야기한 한 부분들이라는 진단이다. 도씨는 ‘인간의 해소·해체를 생존 조건으로 삼게 된 현대적 삶의 양식’을 문학을 포함한 인문 문화 위기의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

문학 위기보다는 문화 위기라고 보는 입장은, 문학이 문학의 이름으로 인간을 주장해야 한다는 시각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90년대 문학의 새로운 징후를 조명한 계간 <문학동네> 최근호에서 조형준씨는 ‘문학의 위기는 문화의 새로운 지배 양식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보았다. 문화는 이제 일상은 물론 신체 감각과 의식뿐 아니라 개개인의 상상력까지 지배한다는 것이다. 문화(산업 논리)의 새로운 지배력은 시인·작가뿐 아니라 모든 개인을 자연, 즉 총체성으로부터 격리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정부 당국은 문학의 해를 제정하고 ‘문학의 권위와 권능’을 북돋우려 하고 있지만, 정부 당국이 지원하려는 ‘문학’과, 문학 내부에서 ‘선택이 아닌 결단의 문제’로 상정하고 있는 문학은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앞의 문학이 문화재 보호와 같은 성격에서 ‘문학’을 옹호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문학은 부정의 정신으로 총체성을 건설하려는 인간의, 인간을 위한 문학이다. 그러므로 문학의 해는 일부 문학인들에게는 역설이다.

<소설의 운명>에서 서영채씨는, 문학은 ‘무한 경쟁의 전사’들에게 힘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바로 그 일상의 논리를 회의하게 만든다면서, 그 훼방꾼의 자리, 불평분자의 자리, 터무니없는 몽상가의 자리야말로 우리 시대의 소설(작가)이 고수해야 할 자리라고 말했다. 문화와 문화산업 논리 사이에서 문학이 결단의 배수진을 치고 있을 때 ‘문학의 해’의 팡파르가 울려퍼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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