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장편 소설〈바이올렛〉
  • 이문재 편집위원 (moon@e-sisa.co.kr)
  • 승인 2001.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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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된 영혼'의 자살과 부활/
익명의 존재들에 대한 '따뜻한 옹호'


스물셋에 죽은 여자가 있다. 서울 한복판, 미술관 옆 공터에 흙구덩이를 파던 굴삭기에 몸을 짓찧으며 제 삶을 지워버린 여자. 부재와 결핍, 단절과 소외가 자기 삶의 전부였던 여자. 속눈썹이 길고, 늘 망설이고 주저하던 여자. 식물에서 위안을 받던 식물 같은 여자. '그 남자'를 위해 바이올렛을 심던 여자. 그 여자는 제 안에 '수천 년 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던 울음'을 터뜨린 다음, 굴삭기 '아가리'에 들어가 자진(自盡)한다.




누가, 대체 무엇이 그녀, 오산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신경숙씨가 최근 펴낸 전작 장편 〈바이올렛〉(문학동네)의 독후감은 저 질문으로 집중된다. 오산이라는 '조그만 여자애'의 짧은 일대기인 이 소설은, 유년기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 그늘을 드리우는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식물처럼 무력한 여성이 어떻게 그 '무심한 폭력' 앞에서 스러지는지를 섬세하게 보고한다.


소설의 문체는 긴박하다. 마치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주인공 오산이를 따라가는 것 같다. 현재진행형 문장은 곳곳에 등장하는 고유 명사와 결합하며 극사실주의적인 효과를 확보한다. 냉정한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는 작가는, 오산이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광화문과 삼청동 일대의 거리, 카페, 극장, 고궁, 건물 등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 극사실주의는, 평론가 신수정씨가 지적했거니와, 소설 속에서 역전된다. 구체적인 공간은 원경으로 물러나고, 대신 비현실인 오산이의 삶이 '현실'로 다가온다.


남성중심주의 향한 '죽음의 돌진'


오산이의 삶은 한마디로 결핍된 삶이다. 부모와 친구로부터 버림받은 그녀에게 유일한 낙원이었던 고향의 미나리꽝은 서울 도심의 화원과 이어지고, 어린 시절 사랑이었던 남애는 화원에서 함께 일하는 여자 친구 수애로 연결된다. 오산이는 제 안에 숨어 있는 식물성과 만나며 이윽고 성목(成木)이 되려 한다. 하지만 이 나무는 곧 잘려나간다. 속눈썹이 아름답다며 접근해온 남자(사진 기자)를 사랑하지만, 그 남자는 오산이를 기억도 하지 못하고, 오산이는 꽃집 단골인 '최'라는 남자에게 우발적인 폭행을 당한다.


오산이가 자기 몸을 던진 굴삭기는 흙, 즉 자연을 도구화한 도시 문명의 은유이다. 그러니까 오산이는 남성중심주의를 향해 돌진한 것이다. 식물(바이올렛)이며 여성인 오산이가 도시 문명의 벼랑인 굴삭기의 아가리에서 죽어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장소와 그 방식이 의미심장하다. 흙이 반쯤 담긴 굴삭기의 아가리에 (식물인) 제 몸을 매장한 것이다. 오산이는 이 문명이 갖고 있는 근원적 폭력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것이 아니다. 동물에서 식물로, 매장에서 나무 심기로 탈바꿈하는 신화적인 의례를 치르는 것이다.


오산이는 스스로 제물이 된 것이다. 제물은 그것을 바치는 이들의 지극한 바람을 담고 있거니와, 그것은 오산이의 거듭남일 것이다. 오산이는 소설에서 그랬던 것처럼 결핍된 존재들과 대화하면서 거듭남을 꿈꿀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작품을 쓰며 오산이와 '함께 살았던' 작가는 말한다. "오산이는 전화를 걸면 지금이라도 나올 것 같다. 그런 오산이를 제대로 보낸 것 같지 않아 마음이 짠하다. 독자들 속에서 그녀가 부활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독자들에게 바이올렛 꽃송이를 바친 신경숙씨는 오는 9월 초, 독일에 다녀온다. 쾰른 시가 주최하는 '책의 가을' 행사에 시인 김혜순씨와 함께 한국 대표로 초청되었다. 세계 각국 문인이 참가하는 이번 행사에서 신씨는 최근 독일어로 번역된 자신의 소설 〈외딴 방〉의 일부를 낭송하고, 현지 텔레비전 방송의 한국문학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스포츠+코미디
+로맨스는?-김소희



<워터 보이즈>는 마지막 10분을 위한 영화다. 앞부분을 보는 동안에는 ‘저렇게 좋은 소재를 가지고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라는 느낌으로 시큰둥했었다. 10분으로 90분 전체가 용서된다면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 영화의 매력 요소는 누구라도 꼼짝없이 사로잡힐 만한 기발한 소재다. 바로 남자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수중발레를 한다는 설정이다. 10대의 육체란 미성숙과 성숙의 경계에 걸쳐 있으면서 어린아이의 싱그러움과 성인의 힘을 결합한 느낌을 준다. 소크라테스가 미의 절정이라고 찬양했던 그 눈부시게 화사한 육체들이 수영장의 푸른 물살을 가른다니! 게다가 올림픽 경기에서 보이는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의 기계적인 고난도 기술 대신, 돌고래 쇼에서 영감을 얻은 역동적인 동작들, 단체로 벌이는 코믹 퍼포먼스가 여자 친구들의 응원과 신나는 팝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진다면? <워터 보이즈> 제작진은 아마도 직관적으로 그 효과를 알아차렸던 것 같다.


영화는 한 고등학교의 지리멸렬한 수영부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모두들 빠져나가고 딱 한 명 남은 수영선수 스즈키. 생긴 것은 멀쩡한데 하는 짓은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하다. 예쁜 여선생이 취임해서 수영부 재건을 선언하자 농구부·육상부를 탈퇴한 남학생들이 30명이나 모여든다. 그러나 좌절하는 선생님. 그녀가 꿈꾼 것은 수중발레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남자애들이라도 끌고 수중발레를 시키겠다고 선언하고, 아이들은 다시 삽시간에 흩어져 5명만 남는다.


스포츠 영화의 감동은 절정이 오기까지 좌절이 거듭된다는 데서 증폭된다. 아이들에게 이색적인 성취를 가져다 줄 것처럼 보였던 젊은 선생은 임신 8개월이 되도록 변비 때문에 배가 나온 줄 알았다며, 임신이 확인되자마자 환호작약하며 학교를 떠난다. 영화의 중반부는 덩그러니 남겨진 다섯 아이들의 고군분투기이고, 종반부는 28 명이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수중에서 펼치는 군무이다. 물론 영화의 무게 중심은 종반부에 쏠려 있다.
야마구치 시노부 감독은 10대를 겨냥한 영화답게 스포츠에다 코미디와 가벼운 로맨스를 섞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식의 감각이 요즘 아이들에게 먹힐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워터 보이즈>를 계기로 생각해볼 만한 문제는 10대 영화의 가능성이다. 한국 대중 문화가 10대 시장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문제 제기가 심각하게 쏟아질 만큼 10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계에서는 10대가 아직 관심의 중심에 오르지 못한 듯하다. <여고 괴담> 시리즈와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10대의 세계란 대체로 대상이 모호한 코믹 영화 안에 흡수되고 있을 뿐이다. 기성 질서 안에서 10대는 아직도 소외된 집단 중의 하나라는 뜻일까.







가벼움에 담긴
육중한 진심-김봉석



<워터 보이즈>는 유쾌하다. 아니 상큼하다. 팍팍한 남자 고등학교에서 감히 ‘우아한’ 수중 발레를 하겠다는 허황한 이야기 속에서도, 야구치 시노부는 싱그러운 웃음과 감동을 능숙하게 끌어낸다. 펑크족에서 게이까지 <워터 보이즈>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엉망진창 소동은, 인생의 찰나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청춘의 힘이 무엇인지를 찬란하게 묘사한다.


만화 스토리 작가였던 이력답게, 야구치 시노부는 캐릭터와 상황들을 ‘만화적으로’ 기발하게 그려낸다. 스즈키가 좋아하게 되는 여고생 시즈코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자. 자판기에 돈을 넣는다. 나오지 않는다. 두드린다. 그 순간 ‘얏’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발이 자판기를 찬다. 음료 캔이 나온다. 멍한 표정의 스즈키. 이렇게 만난 시즈코는 가라데 유단자다. 늘 스즈키를 툭툭 치고, 스즈키는 반사적으로 움츠러든다.


야구치 시노부는 만화적인 상황과 유머들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세련되게 끌어온다. 여선생에게 혹해서 수영부를 찾았던 수많은 학생들이 수중발레 비디오를 보여주자 교실에서 휑하니 사라져버린다. 이어서 쿵 하는 효과음과 함께 넘어지는 문. 아이들이 수중발레의 기본 동작을 마스터하자 조련사는 상으로 생선을 마구 던져준다. 그리고 한마디. ‘아, 돌고래가 아니었지.’


출세작인 <비밀의 화원>부터 야구치 시노부의 영화는 ‘만화적’이었다. 하지만 <비밀의 화원>은 조금 서툴렀다. 만화적인 캐릭터와 돌출하는 상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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