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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운동의 ‘서사시’를 쓰다

창립 30주년 맞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어제와 오늘

안철흥 기자 ㅣ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11.16(Tue)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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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1월18일 오전 10시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인 세종로 의사회관 계단. 고 은 선생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백1인 결의문을 읽고 있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신앙 사상의 자유는…. 경찰이 들이닥쳐 고선생의 입을 틀어막고 그의 팔을 사정없이 낚아채갔다.’

지난 봄 발표된 이시영 시인의 신작 시집 <바다호수>(문학동네)에 나오는 시 <1974년 11월>의 일부다. 회고조 산문시에 묘사된 정황이 바로 민족문학작가회의(작가회의)의 전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의 출범식 모습. 그 날 고 은 시인이 낭독했던 선언문은 당시 덕성여대 강사였던 평론가 염무웅씨(현 작가회의 이사장)가 썼다. 그 날 시위로 고 은·박태순·윤흥길·조해일·이문구·이시영·송기원 등 30여 명이 연행되었다. 고 은·이호철 씨가 40대였고, 나머지는 대부분 30대였다.

당시 문단을 대표하던 단체는 김동리·조연현 씨가 주도하던 한국문인협회였다. 문단의 대부 격이던 김동리씨는 작가들을 상대로 유신 찬성 서명을 받고 있었다. 젊은 작가들이 문인협회 앞을 시위 장소로 삼은 것은 ‘어용’ 문인단체에 대한 비난의 성격이 컸다.

당시 이시영씨의 나이는 26세. 막 데뷔한 신인 시인이면서 최연소 회원이던 그는 소설가 송기원씨와 함께 ‘총무’를 맡아 새로운 문인 단체의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이씨의 시를 통해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가 보자. 장소는 종로경찰서 정보과 조사실.

‘고은 선생은 긴급조치 하에서, 그것도 백주 대낮 종로 한복판에서 일어난 문인들의 기습 시위에 놀란 서장인지 누구인지 모를 정복 입은 사내에게 무릎을 걷어채이고 있었고 송기원은 돼지 판 돈을 갖고 올라와 등록을 안 하고 거기 온 게 잘못이었고 나는 가방에서 나온 대학원 제출용 리포트 ‘이용악론’이 문제였다.’ (이시영의 시 <아홉 켤레> 중에서. 제목에서 보듯 윤흥길씨는 연행 당시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작품 메모를 지니고 있었다.)

자실 출범은 유신 시대 지식인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그 날 이후 많은 문인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선언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서울신문 기자 정현종 시인은 해고되었다. 대전 MBC PD로 있던 시인 이가림씨도 직장을 옮겨야 했다. 김병걸·백낙청·문병란·송기숙·염무웅 씨는 대학에서 쫓겨났다. 김지하·고 은·송기숙·양성우·임헌영·김남주 씨는 감옥에 갇혔다. 자실은 당시 ‘민족문학의 밤’ 행사를 꾸준히 열면서 유신 반대 운동을 지원했다. 소설가 박태순씨는 “문학 동호적인 친목 모임체가 아니라 당대적 역사 요청에 따라 출사표를 낸 문학운동 구성체였다”라고 유신 시절 자실의 활동을 평가했다.

자실은 1980년 봄 회원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가, 1984년 김정환·채광석 등 ‘새로운 피’가 대거 수혈되면서 다시 몸을 풀기 시작했다. 1987년 9월17일 자실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었다. 정치 상황은 1970년대보다 나아졌지만, 구속 문인의 수는 늘어났다. 작가회의 사무실은 성명 발표와 농성을 하는 문인들로 북적댔다. 농성 때 당시 야당 정치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양주 한 병씩을 보내왔다. 문인들에게 술을 가장 많이 산 사람은 정치인 김상현씨였다.

그로부터 또 세월을 건너뛰어 2004년. 작가회의 창립 30주년을 앞둔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 이시영 시인은 “자실은 문인협회에 대한 반발로 출범했다”라고 말했다. 두 단체의 힘은 이미 역전된 지 오래. 문인협회가 원로 문인들의 친목 단체로 쇠락한 반면 작가회의는 가장 활발한 현역 작가 조직으로 성장했다.

‘변신’ 둘러싸고 노선 갈등도

그러나 작가회의의 과제가 문인협회를 누르는 것에 있지는 않을 터. 작가회의는 조직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문단의 중심에 서 있을까. 현재 작가회의의 고민과 과제는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출범 때 1백1명이던 회원이 1천1백 명으로 불어났지만, 올해 문학상을 휩쓴 소설가 김영하씨를 비롯해 신세대 작가 상당수는 회원이 아니다. 신경숙·은희경 등 인기 작가들도 명목상 회원으로 머무르고 있다. 회원들 내부에서 ‘민족 문학 개념이 아직 유효한가’라는 문제 제기가 나오기도 한다.

염무웅 이사장은 이에 대해 “민족 문학 개념은 분단 상황에서 상당 기간 지속되겠지만 이를 넘어 보편성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작가회의가 칠레·몽골·베트남·팔레스타인·이라크 등 제3 세계 작가들을 초청하고, 남북작가회담을 추진한 배경에는 이런 고민이 배어 있다.

그러나 작가회의의 변신을 견제하는 움직임도 거세다. 소속 작가 몇몇이 문학의 현장성과 운동성을 강조하면서 작가회의를 비판하고 나선 것. 이들은 내년 초 한국문학평화포럼을 발족할 예정인데, 고 은·조정래·임헌영·송영·김영현 씨 등 중진들이 동참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단체는 작가회의 30주년 전야제날인 11월13일, 전북 부안에서 ‘상생과 평화 공존을 위한 문학 축전’을 따로 개최했다.

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인 시인 홍일선씨는 우연히 날짜가 겹쳤을 뿐 작가회의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같은 날 두 곳으로 나뉜 작가들의 모습에서 진보적 문인 단체가 직면한 고민을 엿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작가회의 김형수 사무총장은 “작가회의는 반체제도 체제도 아닌, ‘비체제’로서 문학 본연의 길을 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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