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표가 뜬다 한들
  • 문정우편집장 (mjw21@sisapress.com)
  • 승인 2004.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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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에 이어 입법부에서도 정권 교체가 진행된다면 사회 각 분야에서 권위주의의 그늘은 급속히 걷힐 것이다.
2000년 5월 우연한 기회에 독일에 가 있다가 광주항쟁 20주년 기념 행사를 전하는 CNN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당시 함께 있던 남미 기자들이 물었다. 외신을 통해 한국의 광주항쟁 관련 기사를 자주 보았는데 도대체 희생자가 몇 명이냐고.

한국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가 1백91명 부상자가 8백52명이라고 답해주었더니 일제히 조금은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기 군사 독재에 시달렸던 남미 국가 치고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수만명에 달하지 않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그만하면 한국은 ‘해피하게’ 군사 독재의 터널을 빠져나온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부마사태·광주항쟁·6월항쟁 등을 거치면서 아슬아슬한 국면이 많았지만 전세계에서 한국만큼 피를 많이 흘리지 않고 군사 독재를 퇴각시킨 예도 드물다.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직접 뽑을 권리를 되찾은 유권자들은 매번 투표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군사 정권의 맥을 이은 세력들을 정치 무대에서 밀어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답답할 정도로 더뎠고, 방식도 과감하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1992년에는 신군부와 손잡은 YS를, 1997년에는 군사 독재의 원조인 JP와 손잡은 DJ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러다 지난 대선에 이르러서야 3공이나 5,6공 출신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은 노무현씨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 과정에서 과거 군사 독재에 부역했던 인물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갔다.

행정부에 비해 국회에서의 인적 청산 속도는 더욱 느린 편이었다. 3당 합당 때 잠깐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되었으나 YS가 여당에 투항한 이후 군사 정권의 맥을 이어온 세력이 계속 원내 다수당 자리를 차지해 왔다. 그런데 이번 4·15 총선을 계기로 원내의 세력 판도에도 큰 변화가 생길 것 같다. 행정부에 이어 입법부에서도 정권 교체가 진행된다면, 사법부를 포함한 사회 각 분야에서 권위주의의 그늘은 급속하게 걷히게 되어 있다.

이번 총선을 거치면서 군사 독재 치하에서 옥고를 치른 사람들은 대중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씨에게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의 상처들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느려터진 듯이 보이더라도 역사의 수레바퀴가 전진하고 있는 게 엄연한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과거의 향수에 젖어 잠시 주춤거린다 한들 뭐 그리 탓할 것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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