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공존 포기하자?
  • 박상기 (연세대 법대 학장) ()
  • 승인 2003.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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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송금 의혹을 수사하기 위한 특별검사팀의 수사가 몇 달째 진행 중이다. 특검팀은 지금까지의 수사는 ‘초벌구이’이므로 수사 기한 연장을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 의지가 대단하다.

이제 남북 정상 간의 회담과 6·15 남북공동성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돈을 주고 산 한낱 정치 쇼에 불과한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또한 당시 관계자들은 범죄 가담자가 되어 이미 구속되었거나 조사를 받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특검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사하기 위한 예비 작업인지는 몰라도 법학교수 등에게 법률 자문을 요청했다는 보도도 있다.

6·15 남북 공동성명 3주년을 맞이한 지금 남과 북이 그 동안 이룩한 긴장 완화와 협력, 그리고 민족 공조 가치는 외면되고 있다. 반면에 특검팀의 수사 브리핑과 소환 예정자에 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경의선과 동해선이 연결되는 현실 앞에서 이것을 가능하게 한 남북 정상회담을 범죄 행위의 성과물로 몰아가는 혼란스럽고 아이러니한 세상이 된 것이다.


대북 송금은 남북이 평화 공존의 틀을 마련하려고 한 정치 협상의 한 부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처음부터 수사 대상이 될 수 없는 일련의 정치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 수사는 특검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국내외의 다양한 DJ 반대 세력이 DJ 정권 5년을 심판하는 정치 보복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그동안 북한 핵 문제가 남북 관계 발전을 지연시키고, 북한에 대한 한국민의 감정을 악화시킨 점도 있다. 그리고 남측이 제공한 돈으로 핵 개발을 했다는 확인되지 않는 주장까지 대두했다. 그러나 남북 관계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으로 본 사람도 없었다. 신뢰 구축을 위해서는 허다한 난관과 인내가 요구되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래도 상호 비방과 전쟁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 현실은 청산되어야 한다는 염원에서 남북 정상회담은 더욱 역사적이었고, 감격적이었다.

그렇지만 김 전대통령 임기 말이 되면서 남북 관계의 투명성이라는 달성될 수 없는 명분으로 포장된 대북 송금 수사론이 제기되었다. 일부 법학자들은 현대 국가에서 대통령의 통치 행위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헌법 이론까지 동원해 수사를 촉구했다. 그러나 옛 소련이나 동유럽권 국가와 수교 협상을 할 때 건네진 자금에 대해서 수사하자고 주장한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특검 수사는 남북 관계가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법적으로도 비정상적이라는 현실을 보지 않으려는 편견이거나, 보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이다. 대통령의 통치 행위 부인론도 대통령이 절대 권력자인 왕처럼 군림하는 독재 국가 출현을 막으려는 데서 비롯한 이론에 불과하다.

분단된 한반도 상황에서 남북 관계가 한쪽만의 실정법 질서 속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은 이율배반적이며, 평화 공존을 포기하자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규정대로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취급한다면 반국가 단체의 수괴와 협상해 공동 성명을 내놓는 초법적 현실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수사 착수 시점에서는 송금된 돈의 성격 규명에서부터 송금 경로, 양측이 접촉한 과정과 자금 조성 경위 등을 수사 대상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여야가 약속했던 특검법 개정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과연 특검이 종착 지점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미로를 헤매고 있거나 갈 데까지 가겠다는 의욕만 충만한 상태인지 모르겠다.

정치가의 공과에 대한 비판은 그의 정책이 현실에 가져다 준 결과에 의해 판단해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성명의 역사적 의미를 ‘법’의 이름으로 파헤치는 오늘의 현실을 두고 후세 역사가가 과연 2003년 오늘을 법치주의가 만개한 민주 독립 국가였다고 평가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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