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대 오른 사법 시험
  • 박상기 (연세대 법대 학장) ()
  • 승인 2003.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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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시험을 변호사 시험으로 전환하고, 판사·검사를 대법원과 법무부가 정한 자격 기준에 따라 선발하도록 하면 현재 나타나고 있는 여러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졸업생들의 취업난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취업 준비를 하지 않는 대학생들이 수만 명 있다. 바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다. 취업난 시대에 이들이라도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않아서 다행인지 모르지만 비정상적인 현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창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야 할 젊은이들을 단순·반복적인 시험 공부에만 매달리게 만드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인재 배출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같은 내용의 시험 공부를 오래 하면 할수록 사고는 경직되고 지식은 얕아지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대법원장과 사법 개혁 추진을 약속하고 실무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사법 개혁과 법학 교육 개혁 작업은 김대중 정부에서는 별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이제 참여정부가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고 어떻게 이를 추진할지가 관심거리이다.
사법 개혁의 출발은 사법 시험 제도 개혁이다. 사법 시험은 법학 교육의 형식과 내용과 법조인 배출 시스템의 골격을 결정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법 시험 제도가 미국·독일·영국 등 선진국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변호사 자격 시험이 아니라 일종의 판검사 임용 시험이라는 점이다. 판검사로 임용되는 비율이 합격자의 30% 정도에 불과하지만 합격 인원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임용 시험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사법 시험의 골격은 일제 때 만들어졌다. 이 제도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신분 상승의 통로로 여겨졌다. 그런데 의사 시험과 달리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응시할 수 있도록 해 가장 신분적 성격이 강한 시험을 가장 평등지향적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또 정원제를 실시해 진입 장벽을 높임으로써 합격 자체만으로도 다른 직역에 비해 훨씬 높은 부가 가치를 누리게 해 전공을 불문하고 사법 시험에 응시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는 물론이고 자연과학도까지도 사법 시험을 준비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들 연구자의 고갈은 한국 사회의 미래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라고 본다.

심각한 것은 비단 법학만이 아니다. 법학 교육은 물론이고 법학자 양성 방식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이다. 대학에서의 법학 교육은 사법 시험 위주로 편성되고, 교수의 연구 영역이 전문적일수록 강의 개설 자체가 어렵다. 그리고 학계와 실무계가 단절되어 법학 교수가 아무리 새롭고 전문적인 분야를 전공했다고 하더라도 별 효용이 없다. 학생들도 사법 시험 준비에만 매달려 법학자 양성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결국 사법 시험을 의사 시험처럼 변호사 자격 시험으로 전환해 메리트를 줄여야 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사법 시험 집중 현상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판사나 검사도 지금처럼 성적만이 아니라 대법원과 법무부가 자격 기준을 정하고 이에 따라 선발해야 수준 저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변호사 가운데에서도 일부를 선발할 필요가 있다.

법률 공부에만 매달려 성적이 좋은 어린 연수원 졸업생은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재판을 진행해 산적한 소송 사건을 줄이는 데에는 능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 경험이 제한된 이들의 재판 결과는 사회적 상식이나 일반인의 법 감정과 유리되기 쉽다. 그러므로 판검사 충원의 통로가 다양해져야 한다.

지금처럼 법대나 의대만을 선호하는 현상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인 다양성의 싹을 자르게 된다. 기업도 유럽 역사를 전공한 학생이 경영학 전공자보다 장기적으로는 유럽 관련 업무를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대학 교육이 실용성이 떨어진다고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현장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인력만을 원하는 태도부터 바꾸어야 대학 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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