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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스크린에 비친 북한 이미지

<공동경비구역> <간첩 리철진> <쉬리> 색깔 각각… 대중 문화의 유연한 힘 드러내

노순동 기자 ㅣ soon@sisapress.com | 승인 2000.09.28(Thu)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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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연출 박찬욱)의 흥행 조짐이 심상치 않다. 지난 9월 셋째주 한 주 동안 전국에서 관객이 100만 명을 돌파해 9일 만에 같은 기록을 세웠던 <쉬리>를 일찌감치 앞질렀다. 개봉관이 속속 늘어나 서울에서만 39개관, 55개의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다.

지난해 한국 영화 사상 최고 히트작이었던 <쉬리>, 간첩에 대한 발상 전환으로 화제가 되었던 <간첩 리철진>에 이어 <공동경비구역>이 분단 소재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리라는 기대감이 높다. 이로써 분단 소재는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했건 그렇지 않건 각별한 상업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세 영화는, 각기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다. <쉬리>(연출 강제규)의 최민식과 <간철 리철진>(연출 장 진)의 유오성과 더불어 <공동경비구역>의 송강호와 신하균은, 남한의 대중 문화에 비친 북한의 이미지를 대표한다. 세 영화가 모두 ‘인간적인 간첩(혹은 군인)’을 깃발로 내건 것은, 등장 인물의 입체감이 영화가 흡인력을 갖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 조건임을 일러준다.

세 영화의 노선은, 각기 다른 것일 뿐일까, 아니면 진화일까. 현재 관객의 반응대로라면 <공동경비구역>이야말로 분단 문제의 무게에 걸맞는 진지함을 갖추면서도 내공 높은 연출력으로 재미까지 잡았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그리고 그 내공은, 북한 군인 오경필(송강호)의 캐릭터에 집약되어 있다.
공동 경비 구역에서 형제애를 나누던 남북의 네 병사 가운데 맏형 격인 송강호는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인물이다. <플레이보이>를 보면서 “역시 미제가 좋아”라고 한 방 먹이고, 자살한 가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들으면서 “갸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라면서 천연스레 남한의 대중 가수를 애도함으로써 허를 찌른다. 왜 북한은 미사일을 만들어 긴장을 고조시키느냐는 남한 병사의 추궁에 “그걸 내가 만드네?”라고 눙치면서 발랄하면서도 속 깊은 인물의 이미지를 빚어낸다.
<간첩 리철진>은 낯선 상황에 던져진 어리숙한 사나이의 좌충우돌 기록일 뿐이고, 공교롭게 그의 직업이 간첩이었을 뿐이다. 어쨌든 관객은 간첩을 주인공으로 하여 코미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뒤통수를 맞았다.

‘인간적인 간첩을 그린다’는 발상은 영화사의 것이었다. 하마터면 관객은 장 진 감독의 코미디가 아닌, 박찬욱 감독의 휴먼 드라마 <간첩 리철진>(연출 장 진)을 만날 뻔했다. 박감독은 1차 시나리오를 썼으나 영화사가 수정을 요구했고, 시각 차이를 절감한 그가 일치감치 손을 털었다. 그 기획이 고스란히 장 진 감독에게 넘어가 코미디 <간첩 리철진>이 탄생했다.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이 군데군데 분위기를 코믹하게 이끈 부분이 있지만, 코미디는 아니다. 분단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기에는 나는 너무 무겁다”라며 웃었다.

이 뒷얘기만큼 <간첩 리철진>과 <공동경비구역>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드물 것이다. 대학 시절 이후 박찬욱 감독의 현실 인식은 더 진지해졌다. 그에게 분단은, 줄곧 불가해할 정도의 억압을 강요하는 괴물이었다. 철책은 자유로운 생각을 가로막고 주눅 들게 할 뿐 아니라, 남북한 젊은이들의 젊음을 고스란히 앗아갔다. 그는 체제 대립을 존립 기반으로 삼은 남북의 체제가, 그 안의 개인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개인의 온기가 그 간격을 좁힐 수는 있지만,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불청객으로 인해 네 병사의 이별 파티가 일촉 즉발의 인질극으로 변해 버리고, 그동안 호형호제했던 개인적인 유대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극적인 상황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 평론가 이효인씨의 말은 <공동경비구역>이 서 있는 자리를 잘 짚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씨는 “이 영화는 민족주의와 과잉된 집단 의식을 견제하는 시각을 제공하고, <쉬리>가 얼마나 위험한 영화였는가를 그 반대편에 서서 일러준다”라고 말했다(하지만 이씨의 시각은 <공동경비구역>도 하나의 기획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분단 현실을 다룬 영화의 경우, 영화는 항상 북한과 남한 전체를 주체로 삼기 일쑤였고, 그 안에 갈등이 있다 해도 현실주의자와 낭만주의자의 대립이 있을 뿐이었다. 개인은 체제, 혹은 노선의 대표자였다. 주변 열강에 눈이라도 돌릴라치면 예외 없이 호전적인 민족주의에 호소한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유령>).

<쉬리>는 아예 할리우드의 스파이 영화처럼 멜로 첩보 영화로 흐른 경우다. 관객 가운데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한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이 정도 규모와 재미를 갖춘 영화를 만들 수 있어 대견하다는 찬탄은, 흥행 기록에서 알리바이를 찾았다. 돈을 위해 분단 현실을 팔아먹었다는 촌평은 괜한 딴죽이 아니었다. <쉬리>는, 특공조 최민식을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써먹은 것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영화 말미에 그로 하여금 얼마나 통일이 절박한지, 자신이 얼마나 몸을 불사를 각오가 되어 있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게 만들었다. 배우 최민식은 오로지 연기의 힘으로 평면적이고 관념적인 인물에 가까스로 생기를 불어넣었다.

반면 <공동경비구역>은 진지하고 정성스럽게 인물을 빚었을 뿐 아니라 치밀한 고증 덕에 체취를 더했다. <공동경비구역>의 북한 군인들은 더 이상 “종간나 새끼, 죽여 버리갔어” 따위 말투를 쓰지 않는다. 북한 군인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처음 북한 말 자문에 응하기 위해 합류했다가 각색자로 비중이 커진 북한 출신 작가 정성산씨의 공이다.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4년 동안 영화 연출을 공부하다가 귀순한 정씨는 이곳의 반공 드라마 때문에 잘못 굳어진 북한군의 이미지를 모두 뜯어고쳤다. 관객의 고정 관념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북한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정성산씨는 <쉬리>(연출 강제규) 때도 자문에 응했지만 별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웹 저널 <필름 2.0>과의 인터뷰에서 “<쉬리>는 정말 ‘아닌 영화’다. 내가 고증한 것을 다 무시했다”라고 말했다).

완성도와 태도에 편차가 있다 해도 위 영화들이 모두 남북의 화해 무드가 무르익기 전부터 기획되었다는 점은, 대중 문화 특유의 유연함이 미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공동경비구역>은 최근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꽤나 구설에 시달렸을 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 호응을 보내는 것은, 적어도 이 작품은 정세 덕을 보려는 얄팍한 기획의 결과가 아니라는 신뢰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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