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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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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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주의 없는
진실의 감동-김영진



켄로치의 영화 <빵과 장미>는 노동자의 연대를 감동적인 톤으로 웅변하는 것이 아니라 못사는 사람들 사는 속내를 낮은 톤으로 보여준다. 어떤 삶의 선택도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지만, 일단 자기 계급보다 힘센 계급과 맞서 싸울 때는 삶이 훨씬 힘들어진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불법 이민 노동자들에게는 생계를 위해 빵이 중요하지만 인권을 뜻하는 장미도 중요하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미국에 들어온 멕시코 이민 노동자 마야가 노조운동가 샘의 충고로 동료들과 함께 노조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언니 로사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샘과 마야는 단결하지 않으면 빵뿐만 아니라 장미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로사에게 현실이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빵과 장미>의 설득력은, 모든 이에게 각자 삶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공평하게 배분한 플롯의 여유에서 나온다. 노조 결성을 둘러싸고 청소원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이 영화는 노조 결성에 적극적인 사람과 소극적인 사람들의 입장을 다 보여준다. 저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동정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그네들의 삶에 공감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


<빵과 장미>는 세상이 권선징악의 순리로 풀려 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자명한 현실을 가리킨다. 거기에 대들든 순응하든 저마다의 삶은 너나없이 힘들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매일매일 힘들게 자신과, 주변 현실과 싸우고 있다.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낙관과 삶의 에너지를 지니려 애쓰며 그네들만의 공동체를 이룬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동시에 오는 이 영화의 결말 장면에서 등장 인물의 생생한 얼굴 표정과 감정은 복받치는 눈물을 참기 힘들게 만든다. 그 장면에 감상적인 시선은 없지만, 시사 잡지 토픽 난에 실릴 사연에서 피와 살이 있는 이야기를 끌어낸 것을 보는 일은 감당하기에 벅차다. 세상은 부당하며 때로 그 부당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선택도 부당해질 수 있지만 사람 자체는 부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 영화에 담긴 인간애 때문이다.


삶은 살아내기에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어차피 그렇다면 함께 웃으면서 천천히 손을 잡고 가자는 노 사회주의자 감독의 결기와 여유가 <빵과 장미>에는 있다. 어떤 가식적인 제스처도 없이 세상의 변화 가능성을, 인간적인 유대감의 소중함을 깨닫게 만든다.








불편해서 절절한
‘못난 사람’ 이야기-심영섭



로스앤젤레스의 가장 부유한 빌딩 안에는 몇 년이나 딸의 얼굴을 못 본 가난한 아낙네와 법대 입학 꿈을 안고 현실을 감내하는 선한 눈의 청년, 술집 종업원 대신 청소부를 택한 아가씨 등이 시간당 5.75 달러의 임금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을 청소할 수 있으되 자신의 삶에 척척 달라붙는 가난의 먼지는 한 오라기도 제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켄 로치는 가장 부자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삶을 영위하는 청소부의 삶을 통해, 그들에게도 빵뿐 아니라 장미가, 인간적 자존심이 필요하다고 말해준다.


켄 로치의 여주인공들은 흔히 애인을 잃거나 사회복지부에 아이를 빼앗기거나 심지어 사살당하기도 하는 사나운 운명을 지닌 이가 대부분이다. 낮은 자 중에서도 더 낮은 자로서 그의 영화에서 여자들이란 흔히 계급적 상흔과 동일시되는 피사체이기 때문이다. <빵과 장미>의 두 주인공 로사와 마야도 마찬가지이다.


악질 주임에게 노조 주동자들을 밀고한 것이 바로 언니라는 사실을 안 마야는 로사에게 배신자라고 대든다. 그때 로사는 “니가 어떻게 배를 불렸는 줄 아느냐?”라고 질문한 뒤, 가족을 위해 창녀 노릇을 했던 5년 간의 삶을 생생히 묘사한다. 눈물을 흘리며 “나는 몰랐다”라고 도리질하는 마야. 보는 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 불을 놓는 이 장면에서 ‘빵뿐 아니라 장미를’이라는 구호는 절절한 비명으로 들려온다.


켄 로치의 영화는 늘 껄끄러운 가시처럼 우리의 의식을 건드려 왔다. <빵과 장미> 역시 권력 문제는 대도시의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빵과 장미>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장소를 옮긴 켄 로치는 거센 영국 사투리에 담겨 있던 특유의 유머와 캐릭터의 힘을 잃었지만 영화의 진정성만은 잃지 않았다.


켄 로치의 영화를 영접하는 일은 제일 후미진 골방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는 것과 비슷한 비밀 의식 같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켄 로치라는 이름조차 보통 명사로 전락하는 이 시대에 마야처럼 몰랐었다고 도리질하는 우리들은 이제는 마르크스 대신 축구를 보고 있다. 그러나 <빵과 장미>는 그게 아니라고 말해준다. 노동과 계급의 문제는 여전하다고, 인간적인 삶의 조건은 여전하다고. 핏빛 투쟁의 색깔은 줄어들었지만, 켄 로치의 영화는 여전히 지구상 어디에선가 잊힌 싸움을 힘겹게 벌이는 사람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우고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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