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단 ‘북녀들’
  • 안병찬(<시사저널> 편집고문·경원대 신방과 교수) (abc@sisapress.com)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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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다대포항에 접안한 만경봉 92호는 화제를 만들고 있다. 이 북쪽 여객선은 북녀들의 눈부신 미모와 다채로운 응원 솜씨를 만재한 ‘쇼 보트’이다. 남쪽의 골수 여권주의자에게 이 배의 북녀들을 ‘꽃미녀’라고 부르는 것은 반칙이다. 오로지 남남의 눈으로만 북녀를 바라보다니 부당한 일인 것이다. 어느 북녀는 미인의 비결을 물으니 ‘마음이 고우면 용모도 고와지디요’ 하고 답한다.






어떤 남쪽 필자는 ‘미녀 응원단 칭찬의 함정’을 얘기했다. 언론이 갑자기 북녀 응원단의 용모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구태의연한 대남자주의(남성 쇼비니즘) 심보를 드러내는 것이라는 요지로 꼬집는다. 또 쇼 보트의 북녀들을 체제 안보적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기쁨조와 다를 바 없는 기계적인 율동과 인공적인 표정, 진한 화장과 상투적인 답변의 응원단을 칭찬만 한다면 북한 선전 방식을 수용하는 것으로 비치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다’고 염려하는 대목이 나온다. 금관 악기를 연주하는 취주악단원은 인민안보성 소속 단원(그녀들은 청년취주악단이라고 말함)이고, 율동적으로 응원하는 예술단원은 각 도 예술단체에서 엄선한 여성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도 한다.



구태 못 벗어난 남측 요원들



그렇지만 이와 다른 시선도 있다. 북에서 귀순한 한 여배우는 혁명 세대가 이미 옛말이 되어 가고 출신 성분의 중요성이 점차 약해지고 있는 북한 현실을 강조한다. 그녀는 북녀 응원단이 당 고위 간부 자녀들로 구성되었으리라는 일부 추측을 일축한다. 다양한 재능을 갖추고 외모가 빼어나며 사상이 투철한 중상층 가정의 20대가 뽑혔을 것으로 본다.



안보관과 다른 시선은 또 있다. 환대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북측의 변화한 모습을 제대로 보자는 것이다. 저쪽에서 한국 응원단을 찾아 먼저 인사를 하는가 하면 취재 기자에게 농담을 걸기도 한다. 오히려 커다란 장벽을 치는 것은 이쪽으로 여겨진다. 국정원 직원과 경찰관으로 구성된 안전통제요원들은 일반인은 물론 취재진의 접근을 원천 봉쇄한다.


오히려 북한 선수단 입에서 “여기서는 행동의 자유가 없다”라는 말이 튀어나오니 희한한 일이 아니냐는 말이다. “세상에나. 그 말은 지금까지 우리가 북측에 대해서 해온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통제를 강화하라고 시킨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렇게 어느 현장 취재기자는 묻고 있다. 당국자들은 이런 ‘차단’보호를 안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통제로 비칠 뿐이니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다.



어찌했거나, 쇼 보트의 북녀들을 둘러싸고 이런 말 저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나는 냉전의 절정기에 홍콩에서 본 ‘북괴팀 응원’ 사건을 다시 떠올린다. 구룡 지역에 엘리자베드(伊麗莎白) 실내 경기장이 있었다. 월드컵 배구대회 아시아 지역 예선 여성부 결승전에서 맞붙은 것은 ‘북괴팀’과 ‘중공팀’이었다.


‘북괴팀’이 2 대 0으로 이기다가 3 대 2로 역전패한 아슬아슬한 경기. 홍콩의 중국 관중은 ‘중공팀’만을 천장이 떠나가게 응원했다. ‘북괴팀’ 경기를 보러간 한국 교민 수십 명은 응원을 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유독 한 사람만 큰소리로 ‘북괴팀’을 응원했다. “이겨라!” “잘한다!” 그 한 사람 외침이 얼어붙은 정적을 깨고 크게 울려 퍼졌다. 그 뒤에 그가 총영사관 안기부 요원에게 불려가 “야, 왜 손뼉쳐? 국가보안법에 얻어맞아 보겠냐” 하고 추궁을 당한 것은 물론이다. 끝내 그는 본국에 압송되어 호되게 경을 쳤다.



우리는 과거에 상실했던 것을 오늘 되찾을 수 있고, 오늘 부족한 것을 내일 보충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희망을 안고 산다. 비록 정치권은 ‘북한 비밀 지원설’을 두고 생사를 걸고 싸우지만, 오늘의 남북 관계는 대변동을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며칠 전 한국 가수들이 동평양대극장 무대에 나가 공연했다. 어떤 노래가 분단의 감정을 가장 절실하게 자아냈을까. 나는 남남북녀의 부모를 둔 ‘남성 고음 가수’ 임응균이 부른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가 만당의 평양인을 움직였다고 여긴다. 남북 관계에 파천황(破天荒)이 개시되었음을 믿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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