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과 의리 넘치던 잃어버린 거리의 기억
  • 강철주 편집위원 (kangc@sisapress.com)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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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구 지음 <명동 백작>/전성기 명동의 낭만과 애수
대학 신입생이던 1970년대 후반에 처음 명동 구경을 했다. 선배들이 후배들 때 벗겨준다며 우르르 명동으로 몰고 가서는, 앞으로 한 시간 안에 아가씨 한 명씩 ‘꼬셔서’ 재집결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다른 친구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서울 변두리 달동네 출신 촌놈이던 내게는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길을 잃는 바람에 그냥 자취방으로 내빼듯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그때도 사실 명동은 왕년의 명동이 아니었다. ‘서울의 긴자’라는 명성은 무교동·관철동·서린동 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굳이 대학생들이, 치기 만만한 젊음의 통과 의례를 명동에서 치르려고 했던 것은 문단 야사 따위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1950~1960년대의 명동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성기 명동의 그 숱한 낭만적 전설에 일종의 허기 같은 그리움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명동 백작’이라고 불릴 만큼 골수 명동파였던 이봉구는, <1950년대>를 펴냈던 시인 고 은과 함께, 명동 신화를 만들고 유포한 대표적 작가이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명동 백작>(일빛 펴냄)에는 일제 말에서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전설이 된 명동 20여년사의 일화들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명동 일대의 다방과 대폿집 등을 무대로 펼쳐지는 추억담이 살아보지 못한 세월에 대한 독자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다.

일제 말, 청마 유치환이 이 땅이 싫어 만주로 떠나는 길에 명동의 한 바에 들러 여급을 앉혀 놓고 술을 마시는데, 이 여급의 재치가 보통 아니다. 청마의 시 <깃발>을 줄줄 외고는, 자기가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같은 여자’란다. 북방 출신인 시인 이용악은 술이 취하면 방랑의 애수와 낭만에 한껏 젖은 얼굴로 <오랑캐꽃> <분수령> 같은 자신의 작품을 억센 함경도 사투리에 담아 읊조리고는 했다.

요절한 여류 작가 전혜린은 학생 시절부터 명동에 나타나 쟁쟁한 기성 문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기염을 토했다. <보리밭>을 작곡한 윤용하는 명동 일대를 서성거리다가 지인을 만나면 돈을 타내 대폿집으로 직행했다. 수주 변영로는 만년에 후두암이 도져 약병을 들고 나타나서는 남들 술 마시는 양을 보며 침을 삼켰고, 공초 오상순 역시 술을 못하면서도 늘 명동에 나와 앉아 고독을 달랬다.

건달들도 문화 예술인 배려하는 금도 보여

비극도 적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많은 남녀 문화 예술인이 이념을 따라, 혹은 사랑을 좇아 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영영 명동에서 볼 수 없게 되었는가 하면, 음악가 김인수처럼 대폿집에서 술잔을 손에 쥔 채 절명한 이도 있었다. 시인 박인환 또한 명동에서 술을 억병으로 마신 3월 어느날 밤 집에서 숨졌다. 단골이던 빈대떡집 마담은 ‘꽃피기 전에 외상 술값 갚겠다더니…’라며 울먹였고, 호상을 섰던 친구들은 너도나도 죽은 박인환의 입에 위스키를 부어주며 대작이라도 하듯 마셔댔다. 시인의 아내가 훗날 명동에서 술장사로 나서게 된 것 또한 비극이라면 비극이었다.

유흥업소가 밀집한 곳이어서 명동에는 건달들도 많이 꾀었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 예술인들을 ‘선생님’으로 배려해줄 줄 알았다. 이화룡 같은 거물 주먹도 술 취해 객기 부리는 문화예술인들을 점잖게 대하며 도리어 자리를 피해주는 도량을 베풀었다. 명동은 또한 여인천하이기도 했다. 유명한 마담과 여급 들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배우들도 명동 출입이 잦았다. 최은희는 낙랑다방에서 결혼 축하연을 했고, 대폿집 은성에 나타나 홀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강효실은 직접 다방을 차리기도 했다.

이 모두가 ‘주머니는 늘 적막강산’이었지만 인정과 의리가 넘쳐나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새삼스레 웬 복고 취향이냐고 물으면 할말 없지만, 살아 남기 위해, 떨려나지 않기 위해 마냥 팍팍해질 수밖에 없는 요즘 같은 때 이 책이 전하는 정취와 촉촉한 인간적 습기가 더욱 그립고 소중해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언론인 출신으로서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낸 남재희씨가 자신의 문주(文酒) 교유 40년을 담아 최근 펴낸 <한국 언론 정치 풍속사>를 같이 읽으면 재미가 배가된다. 주무대가 관철동을 비롯한 종로 일원이어서 <명동 백작>과 좋은 짝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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