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명상 여행
  • 합천 해인사·吳允鉉 기자 ()
  • 승인 2000.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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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 대상 사찰 수련법회 인기… 좌선·백팔배 통해 참다운 자아 발견
‘그는 꽃향기를 맡아본 일도 없고, 별을 바라본 일도 없어. 더하기밖에는 아무 한 일이 없어. 그러면서도 온종일 나는 착한 사람이다, 착한 사람이다 하고 되뇌지. 그리고 이것 때문에 잔뜩 교만을 부리고 있어. 그렇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야, 버섯이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이 구절대로라면 도시 사람 대부분은 ‘버섯’이다. 현대인들, 특히 도시인들이 얼마나 물질적이고 이기적인가. 하지만 그 버섯들 가운데 조금 다른 버섯이 있다. 고민하는 버섯. 그들은 간혹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더하기만 하고 있지 않은가?’ ‘꽃향기를 맡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그들은 스스럼없이 짐을 챙긴다. 그리고 일상에 찌든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길을 나선다. 참다운 ‘나’를 찾아 짧은 출가를 단행하는 것이다.
<부모은중경> 읽으며 효 깨닫기도

지난 7월1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는 일상을 탈출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든 초심자 1백70여 명이 2000년 수련법회에 참가했다. 4박5일 간의 수련회 사흘째 날. 청신남(淸信男:남자 수련생)·청신녀(淸信女:여자 수련생) 들은 <반야심경>을 한 자 한 자 사경(寫經:불경을 베껴 쓰는 일)한 뒤, 근처 계곡으로 포행(산책)을 떠났다. 그들은 좌선과 108배로 지친 몸을 물에 담고 모처럼 활짝 웃었다.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절을 빠져나간 사람이 스무 명쯤 되는 고된 수련회에서 맛보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금세 깨졌다. 해인사 율원장(律院長)인 혜능 스님의 계율론(戒律論) 특강이 있고, 연이어 좌선이 시작되었다. 수련생들이 해우소(解憂所:화장실)를 갔다 오기가 바쁘게 젊은 지도 스님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빨리 좌선 대형으로 앉으십시오!” “차수(叉手:왼손 등에 오른손 바닥을 포개 단전 위에 두는 것)하고 묵언하십시오!” 그 불호령을 듣는 순간 이 수련회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호령이 몇 번 더 떨어지고 팽팽한 긴장 속에 수련생들이 가부좌를 틀고, 눈을 반쯤 뜬 채 좌선에 들어갔다.

온갖 망상과 도시에서의 잡다한 걱정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수련생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졌다. 몇몇 사람은 망상이 떠오르는지 몸을 뒤척였다. 빡빡한 일정에 끌려 다니다가 지친 몇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졸기도 했다. 그때 벼락처럼 떨어지는 죽비. 딱, 딱, 따닥 딱…. 등에 꽂히는 죽비가 어떤 법어보다도 나은 꾸짖음으로 들렸던 것일까. 죽비를 맞은 수련생이 두 손을 모아 고마움을 표시했다.

좌선을 끝낸 뒤 수련생들끼리 서로 등과 팔다리를 주물러주었다. 60억 분의 1이라는 어마어마한 비율로 만난 사람들이 나누는 인정이 더없이 도탑다. 그러고 보니 수련생 모두가 선량해 보였다. 누가 잘못해 발을 좀 밟아도 눈을 흘기지 않을 것 같았다. 나직한 소리로 이야기하면 무슨 이야기든 술술 나눌 이웃처럼 보였다.

참선을 끝낸 뒤 해우소로 걸어가는 수련생들이 발을 절룩거렸다. 몸이 호리호리한 한 청신녀는 법당 문에 기댄 채 이마를 짚고 서 있다. 해우소 앞에서 만난 한 60대 청신남은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쉬엄쉬엄 절 구경 하면서 몸과 마음을 씻으러 왔는데, 이건 고행이다. 지금도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라고 속닥였다.

저녁 식사는 발우공양. 네 개의 그릇을 펼친 뒤, 조심스레 밥과 된장국·김치·물 들을 받았다. 발우공양은 고픈 배를 채우는 데 그치지 않고, 평등과 생명, 환경의 진수를 깨닫는 자리이다. 하지만 지도 스님들의 끊임없는 지적과 호통 때문에 밥맛을 느낄 사이가 없다. 반쯤 얼이 나간 상태에서 밥과 찬을 비운 뒤 물로 발우를 부시기 시작했다. 음식은 수행을 위한 약. 때문에 고춧가루 하나라도 남기면 안된다. 수행자들은 김치 조각으로 발우를 씻고 또 씻은 뒤, 그 물을 마셨다. 짧은 휴식을 취하는 수련생들 사이로 또다시 지도 스님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차수 풀고 잡담하시는 분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의 수행을 방해하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말에 60대 수련생들까지 ‘동작 그만’ 자세가 되어버렸다. 지도 스님의 호령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옆에 갔다가는 시퍼런 서슬에 금방 베일 것 같다.

저녁 예불을 드린 뒤 보경당(普敬堂)에서 <부모은중경>을 소리내어 읽었다. <부모은중경>은 일종의 효경(孝經)이다. 무릎이 까지도록 절을 하며, <부모은중경>을 소리내어 읽었다. ‘…부모의 생활 형편이 춥거나 더운 것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저녁이나 초하루 보름에도 부모를 편히 모실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부모는 밤낮으로 슬퍼하고 탄식을 한다…’ 어떤 구절이 마음을 울린 것일까. 울먹이는 청신녀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부모은중경>은 읽어 가면 갈수록, 그동안 저지른 불효를 또렷하게 떠오르게 하는 경전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의 저녁 좌선을 끝낸 시각은 밤 10시. 수련생들이 꿀맛 같은 단잠에 드는 시각이다. 세면장에 나왔던 40대 남자는 “문득문득 내가 왜 이렇게 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곳에 왔는데 아직도 앞이 캄캄하다. 남은 기간에 그 답을 얻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인 주부 정성자씨(43세·서울)는 정적인 곳에서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굳이 산사를 찾았다며 “이렇게 분주한 생활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한다. 하지만 수련회가 지나치게 불교적인 게 좀 마음에 걸린다”라고 말했다.

새벽 3시. 목탁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어두컴컴한 경내에 올라서자 해인사가 갑자기 음악당이 된 것 같다. 마음을 울리는 낭랑한 목탁 소리가 울리고, 뒤이어 금고 소리와 운판 소리가 어두운 하늘에 번졌다. 수련생들이 보경당 앞마당에 모여들자 범종루에서 둔탁한 북소리와 목이 잠긴 듯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벽 예불을 드린 뒤 <천수경>을 읽으며 백팔배를 올렸다. 그동안 자신이 지은 죄를 참회하는 의식. 온몸을 던지는 수련생들은 집착과 갈등 속에 자신을 내던졌던 시간들을 돌아보며,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팔배로 마음을 가다듬은 수련생들은 암자 순례에 나섰다. 솔 향기 그윽한 오솔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성철 스님이 말년에 주석했던 백련암. 몇몇 수련생이 스님의 말년 생활이 궁금했는지 지도 스님들을 붙잡고 질문을 퍼부었다. 누군가 고심원(古心院) 중앙에 모신 성철 스님의 등신불을 보며 “큰스님(성철)을 부처님처럼 불전 중앙에 모신 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하고 묻자, 한 지도 스님이 “우리도 큰스님 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스님들이 저렇게 모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라고 말을 받았다. 성철 스님의 청빈한 체취를 느꼈는지 본사로 내려오는 수련생들의 발걸음이 더없이 가뿐했다.
“다음에는 자식들과 함께 참여하고 싶다”

점심 공양을 마친 뒤 수련회의 가장 힘든 의식인 천팔십배가 있었다. 염불은 입으로 죄를 참회하고, 절은 몸으로 지은 죄를 참회하는 의식이다. 천팔십배는 또 자신의 원(願)을 빌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이다. 지도 스님이 죽비를 치자 수련생들이 일제히 배를 올렸다. 1배, 2배, 3배…. 3백 배를 넘어서자 청신사들의 등이 땀에 흠뻑 젖어들었다. 거친 호흡 소리가 보경당 안을 가득 채울 즈음, 누군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염불을 외웠다. 5백 배를 넘어서자 앞으로 모았던 두 손과, 절도 있던 몸이 자꾸 흐트러졌다.

밖은 30。를 웃도는 폭염. 이젠 참회도 염원도 잊었다. 오직 자신과의 싸움뿐이다. 두 시간 뒤 싸움이 끝났다. ‘승자’는 예상보다 적었다. 50여 명. 정현 지도 스님은 “천팔십배를 다한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덕분에 사회에 나가서도 뭐든 해낼 것이다”라고 승자들을 격려했다.

짧은 휴식 뒤 가야산 중턱에 있는 마애불 답사에 나섰다. 조치원에서 온 대학생 박우현군(20)이 그 산길에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천팔십배를 하고 난 뒤 맨 처음 어머니가 떠올랐다. 오래 전부터 디스크로 고생을 하고 계신데, 매일 아프다고 해도 그 아픔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천팔십배를 하고 났을 때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는데, 그 아픔이 어머니가 늘 겪는 고통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복받쳤다.” 그는 맏아들로서 늘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부모은중경>을 읽고 몹시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거제도에서 온 박임식씨(49)는 청빈하고 절도 있는 생활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며, 다음에는 꼭 자식들과 함께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수련회 참가자들은 어느 정도 ‘버섯’의 껍질을 벗은 것일까. 일주문을 나서는 그들의 얼굴이 연꽃처럼 환했다. 어쩌면 그들은 더 큰 염원을 품고 해인사를 떠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연꽃이 진흙 속에 살아도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듯이, 도시에서 살아도 이기심과 걱정의 때에 더러워지지 않겠다는 ‘맑은 욕심’을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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