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게임<한국의 위기> 인기
  • 미국 필라델피아·김주환 (뉴미디어 평론가) ()
  • 승인 1996.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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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네트에 가상 현실 게임 <한국의 위기> 등장…상황 설정 실제와 흡사

‘북한과의 모든 외교 채널은 단절되었고, 경제 봉쇄망마저 뚫렸다. 그리고 이제 그들(북한)은 핵폭탄을 가지고 있다. 드디어 한반도에서 핵전쟁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다. 지금 세계 곳곳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상 현실이다. 그 가상 현실의 이름은, 지난해 미국 그래픽 시뮬레이션사가 개발해 판매하고 있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게임 <F18 호네트 2.0 --한국의 위기(Korean Crisisa)>. 이 게임의 겉 상자 앞면에는 세밀한 한반도 지도를 배경으로 F18 전투기들이 날아가는 그림이 커다랗게 실려 있으며,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제품 설명이 적혀 있다.

‘이제 당신은 폭발적인 액션으로 가득한 세계로 출동할 것을 명령 받았습니다. <한국의 위기>는 훨씬 더 세련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혼돈의 세계로 당신을 안내합니다. 전투기·수송기·공군기지 그리고 심지어 적의 목표물까지도 세밀히 묘사된 사실주의의 세계를 경험해 보십시오.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공산주의의 요새(북한)로 침투해 들어가야 하는 스물여덟 가지 새로운 작전명령. 소련에서 제작된 악명 높은 미그 21과 미그 23 적기 등장’.

한반도에 핵폭탄 쏟아붓는 것이 기본 내용

F18 호네트 전투기를 몰고 북한으로 날아가서 폭탄을 투하하거나 공대지 미사일을 발사하여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는 이 게임은, 광고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깜짝 놀랄’ 정도의 사실감을 준다. 작전 지역은 대부분 북한의 이름 없는 마을이나 스커드 미사일 기지이지만, 서울 국제공항, 인천항, 댐, 동두천 그리고 놀랍게도 서울 시내까지 3차원의 다면체 화면으로 등장한다. 북한 미그기와 공중전을 벌이고, 한반도 여러 지역에 공대지 미사일을 쏘아대고, 핵폭격기 B52를 엄호해 한반도 전역에 핵폭탄을 쏟아붓는 것이 이 게임의 기본 내용이다.

F18 호네트 시뮬레이션은 결코 단순한 컴퓨터 게임이 아니다. 아무리 컴퓨터 게임의 도사라 하더라도 이 게임을 처음 만나면 일단 주눅들 수밖에 없다. 진짜 비행기 조종석을 연상시키는 복잡한 계기판은 물론 전투기 이착륙, 십여 가지 공격용 무기, 다양한 레이더 모드, 전파 교란 장치와 자동 항법 장치 등 갖가지 계기와 장치 사용법을 다 알아야만 겨우 시작이라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종 기능을 장황하게 설명한 사용설명서를 열심히 공부해 약자로 된 수많은 전문 용어를 거의 외워야만 한다.

F18기는 한국 공군도 한때 도입하려 했던 미국 맥도널사의 최첨단 전투기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갑자기 F16으로 기종을 변경하는 바람에 율곡사업 중 최대 의혹을 불러일으킨 바로 그 문제의 전투기다. F18의 일종인 ‘호네트’는 항공모함에서 뜨고 내릴 수 있는 최첨단 함상 전투기인데, 지난 2월 부산에 입항했던 미국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에도 탑재되어 있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F18 호네트가 투입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다.

F18 호네트 시뮬레이션을 그저 하나의 게임으로 치부하기에 무언가 개운치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성과 개연성 때문이다. 게임 자체를 사실처럼 묘사한 것도 그렇거니와, 상황 설정과 스토리 전개 자체가 너무도 그럴듯하고 현실적이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현실과 가상 간의 구분이 점차 흐려져 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현대 철학자들의 진단이다. 사실 이 시뮬레이션 게임의 기본 소재가 된 걸프전쟁 자체가 이미 하나의 컴퓨터 게임처럼 치러졌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걸프전 당시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글을 발표하여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는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초현실적인 가상 시나리오가 지루하게 반복되어 사건 자체의 아이덴티티가 상실되었기 때문에, 걸프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가상 현실이었다고 주장한다. 10만여 사상자를 낸 걸프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보드리야르의 논리를 뒤집어 말하면, 한반도에서 핵전쟁은 이미 ‘일어난’ 셈이다.

실제로 <한국의 위기>가 제작된 94년 당시 미국에서는 북한 핵 문제가 커다란 논란거리였으며, 미국 의회와 행정부의 청문회나 대중 매체의 뉴스 토크쇼 등에서는 북한 핵 시설을 폭격해야 하느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봅 돌 당시 상원의원도 북한에 선제 공격을 하자고 강력히 주장했었다. 당시 <한국의 위기> 게임 제작자들에게 한국전쟁은 걸프전쟁만큼이나 현실적인 전쟁이었음에 틀림없다(위 인터뷰 기사 참조).

그러나 이 시뮬레이션 게임을 미국의 호전적인 보수 세력들만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인터네트에는 이 게임과 관련한 웹사이트가 필자가 확인한 것만 해도 백여 개가 훨씬 넘고, 뉴스 그룹에서는 게임과 관련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정보가 교환되고 있다. 나라 별로 보더라도, 독일 네덜란드 영국 캐나다 스웨덴 일본 등에 적을 둔 웹사이트에 시뮬레이션 게임 <한국의 위기>가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심네트’ 등의 네트워크 서비스는 이 게임에 내장되어 있는 네크워크 기능을 통해 인터네트가 닿는 곳이면 세계 어느 나라 사람하고도 <한국의 위기>를 같이 즐길 수 있음을 광고하고 있다. 매일 핵폭탄과 미사일을 싣고 한반도로 날아오는 이 사이버 전투기 조종사들에게는 월드컵 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게 된다는 현실이 오히려 꿈 같은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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