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의 제왕’ 장아찌
  • 이영미 (문화 평론가) ()
  • 승인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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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여름까지는 장아찌의 계절이다. 봄·여름에는 신선한 야채도 맛있지만, 특히 조반에는 짭짤한 장아찌 하나는 밥상에 올라와야 입맛이 돈다. 나는 국문과 출신이면서도 국어학 과목은 요리조리 도망치면서 겨우 전공 필수만 들었는지라 아는 게 없지만, 그래도 ‘장아찌’라는 말이 ‘장’으로 담근 ‘김치’라는 뜻이 아닐까 짐작한다. 김치의 옛 말이 ‘지히’여서 지금도 ‘지’가 붙은 김치 이름이 많다. 짠지·오이지·석박지 등등. 국물 김치 종류를 전라도 지방에서는 ‘싱건지’라고 하는데, 그것도 보통 김치나 짠지보다 싱겁게 담근 김치라는 뜻이다.


장아찌는 배추 아닌 야채로 간장·된장·고추장 혹은 그 정도로 짠 소금물이나 식초·젓갈 같은 것에 담가 오래 보관하며 먹는 반찬 종류이다. 장아찌 종류는 하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간장에 담그는 대표적인 것이 마늘 장아찌이고, 무말랭이도 말린 후 간장에 넣어 먹는 음식이다. 된장에는 깻잎과 풋고추를 담고, 남부 지방에서는 콩잎도 박았다가 꺼내 먹는다. 고추장에는 더덕·도라지·감·늙은 오이 같은 것을 박는데, 경상도 해안 지방에서는 미역귀 말린 것도 박고, 전라도 지방에서는 굴비 장아찌가 별미이다. 젓갈에는 풋고추와 산초(경상도식 추어탕에 넣어 먹는 향료) 순 같은 것을 넣어 삭힌다.


하여튼 먹을 수 있는 것, 특히 맛이나 향이 강하고 수분이 적은 재료는 웬만큼 다 장아찌가 된다. 수분이 많아 시원한 야채는 그냥 먹고, 질기고 강한 야채는 장아찌를 해먹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왜 그리 극성스럽게 온갖 장아찌들을 해먹었을까? 야채란 것들은 늘 제철에 한꺼번에 나오므로, 이를 적절하게 보관하는 방법이 필요했을 것이다. 요즘처럼 온상 재배를 할 수 없었던 시대에, 향기로운 제철 야채를 사시사철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어릴 적엔 밥상 위의 장아찌를 좀 우습게 봤지만, 사실 꽤 손이 가고 재료비도 드는 음식이다. 무엇보다도 요즘처럼 장이 흔하지 않은 시대엔 더 그랬다. 장아찌를 박은 된장·간장은 못 먹고 버리니 얼마나 비싼 음식인가 말이다. 그래도 고추장은 햇것이 맛있으므로 한두 해 묵으면 장아찌 재료로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해도, 된장은 묵을수록 맛있는데 장아찌 박기는 정말 아깝다.





요즘 담글 만한 장아찌감으로는, 마늘과 마늘쫑이 있다. 가을걷이한 논에 심은 논마늘이 알이 통통하게 차올랐다. 어린 것은 겉껍질만 까고 통으로 담가도 되는데, 아무래도 먹을 때 편리하기는 까서 담그는 게 낫다. 신선한 어린 마늘을 속껍질까지 깨끗이 까서, 식초·설탕·소금 약간을 섞은 것을 부어놓는다. 그 물이 약간 노르스름하게 바뀔 즈음 그 물을 반쯤 다른 그릇에 덜어내고 왜간장·조선간장·설탕 등을 간 맞춰 넣는다. 반쯤 따라놓았던 식초물도 함께 넣으면서 짠맛 신맛 단맛을 맞춘다. 그대로 두었다가 마늘 속까지 간이 들면 꺼내 먹는데, 상온에서 2∼3년도 보관할 수 있다.


마늘쫑은 소금과 설탕 약간을 섞은 물에 삭히는데, 노랗게 익으면 꺼내어 고춧가루·물엿이나 설탕·깨소금 등으로 무쳐 먹는다. 집에서 만들어 먹으면 자기 입맛에 맞게 간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엄마가 해마다 마늘 장아찌를 석 접씩 담그는 걸 보고 자랐다. 그래서 어느 해인가 겁없이 마늘 한 접을 샀는데, 까도까도 끝이 나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석 접씩 깠는지, 얻어 먹을 때는 하지 않던 엄마 생각을 했다.


이영미의 음식 이야기는 격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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