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離散 )국보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5.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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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 이산 가족이 있는 것이 아니다.분단은 우리의 땅 뿐 아니라 육체와정신도 함께 갈라놓았다. 국보도 예외가 아니다.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국보들이 있다.
1964년 3월30일 국보로 지정된 국보 제 118호 금동반가사유상. 높이 17cm로 미륵보살이 연꽃 잎 좌대 위에 반가(한쪽 발을 다른 쪽 허벅지에 올려 놓고 앉아 있는 자세)한 이 불상은 힘있는 입과 꽉 다문 입에서 고구려인의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하는 국보다. 광복 직후 시가가 당시 기와집 250채 값에 달했을 정도로 그 가치를 메길 수 없는 문화재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은 1940년쯤 평양 평천리에 있던 일본 병기창 우물에서 출토돼 골동상 김동현씨가 당시 기와집 세 채 값이던 6천원을 주고 입수했는데 김씨가 광복 이후 불상을 등짐에 넣고 월남하면서 이산국보가 되었다. 불상의 광배(불상 뒤에 만든, 깨달은 자를 상징하는 둥근 모양의 장식)가 없어 북한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출토 당시 이 불상은 광배꽂이는 달려 있었으나 광배는 없는 체로 발견되었다. 김씨는 이 불상을 1990년초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넘겼다.
국보 100호인 '남계원 7층 석탑'도 이산 국보이다. 고려 충렬왕 9년(128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탑은 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반영한 고려 석탑으로 평가된다. 원래 개성시 덕암동에 있는 남계원이라는 사찰 터에 있던 것으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서울로 옮겨왔다. 게다가 이 석탑은 기단부가 탑신과 떨어져 있어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국보 85호 '신묘명 금동 무량수 삼존불 입상'도 잃어버린 핏줄을 찾고 있는 국보이다. 1962년 12월20일 국보로 지정된 이 불상은 1930년쯤 황해도 곡산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졌을 뿐 정확한 출토지는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고구려 평원왕 13년인 서기 571년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광배 뒷면에 '다섯 명의 도반(함께 수행하는 동료)이 스승과 부모를 위하여 아미타불을 조성한다'라는 내용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시기적으로 1400년 전에 만들어졌고 광배 양쪽에도 불상이 조각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현재 용인 호암미술관에 수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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