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방위군 그린피스 ‘e-쓰레기’와 전쟁 선포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5.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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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HP·IBM 등 9개사 악덕 기업 지목…삼성·LG는 ‘칭찬’

 
세계적인 환경 보호 단체 그린피스가 각종 전자제품 폐품, 이른바 ‘e-쓰레기’와 한판 전쟁을 시작했다. e-쓰레기가 얼마나 반환경적인지를 적극 홍보하는 한편, 휴렛패커드·델·애플·IBM·도시바· 파나소닉 등 세계 일류 전자 회사들에게도 환경 친화적인 재활용 대책을 내놓으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다 쓰고 난 컴퓨터·휴대전화 등 각종 전자제품이 폐기 처분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과 인체에 유해한 독성 화학 물질을 배출하는 등 e-쓰레기가 상당히 위험한 오염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린피스가 주목하고 있는 품목은 컴퓨터와 휴대전화기이다. 정보 통신 혁명, 세계화 추세를 등에 업고 이들 전자제품 생산과 유통 양이 해마다 천문학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환경 보호와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명제와 관련해 그린피스 등 국제적 환경 NGO(비정부 기구)의 주된 공략 대상은, 자원 고갈·온실 효과 등과 관계 있는 석유 메이저들, 방사성 물질과 평화를 위협하는 원자력발전소, 그리고 생물종 다양성을 해치는 초국적 생명공학 회사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전자 회사들도 이들의 공격에 안심하지 못할 상황이 되었다.

신종 e-쓰레기 주범은 컴퓨터와 휴대전화

그린피스는 왜 전자 회사들을 겨냥하기 시작했는가. 우선 e-쓰레기와 관련된 추세가 심상치 않다. 컴퓨터의 경우 우선 평균 사용 수명이 크게 단축되고 있다. 그린피스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의 컴퓨터 사용 수명은 1997년께 6년이었으나, 올해는 2년으로 줄었다.
 
휴대전화 또한 개발도상국에서 평균 사용 연한이 2년 이하로 떨어졌다. 전자 회사들이 새 제품을 선보이기 무섭게, 새롭게 기능을 추가하거나 용량을 업그레이드한 또 다른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세계는 컴퓨터와 휴대전화 천지로 변하고 있다. 지난해 전세계에서 컴퓨터가 1억8천3백만대 팔렸다. 이는 2003년에 비해 11.6%가 증가한 양이다.
  휴대전화 보급 속도는 더 빠르다. 지난해 휴대전화는 전세계에서 6억7천4백만 대가 팔려나갔다. 세계 인구 10명 중 1명꼴로 새 휴대전화를 장만한 셈이다. 이는 2003년에 비해 30%가 늘어난 수치다.

그린피스의 예측에 따르면, 2010년까지 컴퓨터는 전세계에서 7억1천6백만 대가 더 늘어난다. 컴퓨터 사용을 비약적으로 확산시키는 진원지는 중국과 인도로 지목되고 있다. 2010년까지 중국에서만 컴퓨터 사용자가 1억7천8백만명 늘어나며, 인도에서도 8천만 명이 새로 컴퓨터를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자 회사에는 좋은 소식이지만, 환경론자들에게는 최악의 뉴스다. 전자제품 사용 인구가 급증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 쓰고 버려지는 전자제품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e-쓰레기 발생량과 처리 문제는 이미 재앙 수준으로서, 각국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홍역을 앓고 있다. 주요 e-쓰레기 품목으로는 컴퓨터와 휴대전화 외에 텔레비전·오디오·프린터 따위도 있다. 그린피스는 전 세계에서 버려지는 e-쓰레기 양이 연간 2천만~5천만t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중 1천2백만t이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유럽의 e-쓰레기 배출량은 해마다 3~5배씩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전체 쓰레기 배출량 증가 속도와 비교해 거의 3배 수준이라는 것이 그린피스의 설명이다.

e-쓰레기가 왜 문제가 되나. 바로 처치 곤란함 때문이다. 대개의 전자제품은 몸체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 썩지 않는 물질이라는 것이다. 썩지 않는 물질을 처분하려면 태우거나 재활용하거나, 아예 해외로 보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플라스틱을 태우면, 유독 물질이 나온다. 결국 현재 e-쓰레기를 처분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나라 밖으로 ‘수출’하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그린피스는 지난 5월부터 대대적으로 ‘e-쓰레기와의 전쟁’에 나섰다. 전세계 e-쓰레기 배출 현황을 파악하고, 현재 e-쓰레기가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는가를 추적하며, e-쓰레기 증가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세계적인 전자 회사들에게도 경고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린피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선진국 대부분이 e-쓰레기를 개발도상국에 ‘불법 수출’하고 있었다. 올해 상반기 그린피스가 유럽의 18개 항구를 조사했더니, e-쓰레기를 포함해 유럽에서 나오는 쓰레기의 47%가 유럽 역외 지역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영국의 경우, 2003년에만 e-쓰레기 2만3천t을 해외에 몰래 수출했다. 미국 역시 재활용하려고 수집한 쓰레기의 50~80%를 이런 식으로 수출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미국에서는 쓰레기 해외 수출이 불법이 아니다. 미국은 쓰레기 수출을 규제하는 바젤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몰래’ 또는 ‘합법적’으로 배에 실리는 e-쓰레기는 주로 중국·인도·파키스탄 등지로 향하고 있었다(00쪽 지도 참조). 중국은 2000년 쓰레기 수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그린피스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선진국의 e-쓰레기는 중국 내 최대의 산업 쓰레기 처리 장소인 광둥성 귀위로 흘러들고 있었다. 광둥성 귀위에는 쓰레기 처리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만 10만 명이 있다.

그린피스는 인도에서도 e-쓰레기 처리 문제가 날로 악화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르면, 인도의 델리에만 쓰레기처리업 종사자가 2만5천명이 있으며, 이들이 연간 1만~2만t씩 e-쓰레기를 처리하고 있다. 또한 e-쓰레기 공장은 델리 외에 인도양 서부 연안의 뭄바이, 인도양 동부 연안의 체나이 등 전국에 산재해 있다.

선진국 e-쓰레기 제3세계에 폐기

그린피스는 이와 함께 e-쓰레기 배출의 궁극적인 진원지가 되고 있는 세계 유명 전자 업체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눈을 번득이기 시작했다. 휴렛패커드·델·애플·도시바·파나소닉 등이 1차 ‘검열 대상’에 포함됐다. 소니·노키아·지멘스·IBM·레보노·에이서도 포함되었다. 한국의 삼성·LG도 열외가 될 수는 없었다.

 최근 그린피스는 자기네 웹 사이트에 ‘좋은 기업’과 ‘나쁜 기업’을 선정해, 관련 사진과 함께 공개했다. 애플·후지쓰-지멘스·델·휴렛 패커드-콤팩·도시바·지맨스 등은 행실이 고약해 ‘악덕 업체(Bad guys)'로 찍혔다(00쪽 명단 참조).

 
이들 업체들은 대체로 자기네야 말로 ‘1등 환경 친화 기업’이라고 자부하는 기업들이다. 예컨대 휴렛패커드의 경우, 그린피스가 본보기로 뽑은 선전 문구는 ‘휴렛패커드는 사용 주기 전반에 걸쳐 환경적으로 건전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이다. 하지만 그린피스는 유해 화학물질을 그대로 놔둔 채 내버린 제품 실물 사진을 제시하며 위선을 꼬집었다. 이와 비슷하게 다른 유명 메이커도 ‘e-쓰레기를 대량으로 해외에 버리고 있다’는 이유로, 또는 ‘쓰레기에서 화학물질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악덕 업체 명단에 끼었다. 말하자면 이 업체들은 e-쓰레기 처리와 관련된 각종 위선을 ‘국제적’으로 고발당한 셈이다.

반면 ’다행스럽게‘ 삼성과 LG 등 한국 회사들은 소니·노키아 등과 함께 ’1등 기업(First in Class)'으로 평가받았다. 이 기업들이 e-쓰레기를 줄이거나 유해 물질을 좀더 안전한 물질로 대체하는 등 각 방면에서 성의 있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더 분발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들 업체들은 이르면 올해 안으로, 늦어도 내년까지 현재 유럽연합 등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유해 물질 사용 관련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린피스의 요구를 ‘싹싹하게’ 받아들인 것이다(00쪽 관련 명단 참조).

그린피스는 이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앞으로도 e-쓰레기와의 전쟁에서 한 치 양보가 없을 것임을 다짐했다. 그린피스가 초국적 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끈질긴 싸움을 벌일 때 발휘하는 전투력은 ‘세계 최강’이라고 정평이 나 있다. 그 외 국제적 환경 NGO들의 힘도 날이 갈수록 막강해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그린피스가 전자 회사들의 행태에 지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전자산업을 경제성장의 주요 ‘전략 분야’로 두고 있는 한국에도 예삿일이 아니다. 기업이든 정부든 전자산업 발전 전략을 짜거나 새 제품을 생산할 때 ‘e-쓰레기’ 문제를 고민하지 않았다가는, 상당한 차질과 호된 시련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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