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 자본에 또 당했다”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5.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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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경제] 외국계 펀드에 팔렸던 오리온전기, ‘기업 청산’ 날벼락

 
브라운관을 생산하는 오리온전기에서 11년째 일하고 있던 유국상씨(34)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지난 10월 31일, 오리온전기 주주들이 느닷없이 기업 청산을 결정해 버리는 바람에 유씨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아내가 임신한 상태에서 일자리를 잃은 유씨는 모아놓은 돈마저 없어 앞날이 막막한 처지다. 오리온전기가 청산되면서 유씨처럼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1천3백여명. 협력 업체 직원과 그 가족까지 합하면 수만 명의 ‘밥줄’이 끊겼다.

하지만 앉은 자리에서 날벼락을 맞을 수는 없는 일. 이들은 청산 저지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3년간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위반하고 회사를 갑자기 정리했기 때문에 ‘물고늘어질’ 구석이 있다는 판단이다. 유국상씨는 “8년 동안 한 번도 임금 인상을 하지 않았고, 3년 동안은 거의 모든 직원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지난해에는 상여금까지 반납하면서 회사를 살려보려고 애썼다. 약속을 위반하고 5개월 만에 우리를 버린 주주들의 결정을 그냥 따라야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이들을 헌신짝처럼 팽개친 주주는 홍콩계 펀드 오션링크다. 그러나 더 거슬러올라가면 미국의 구조 조정 펀드 매틀린 패터슨(MP) 펀드가 있다. 한때는 대우 계열사였고, 종업원 7천명을 거느리며 탄탄하게 성장하던 오리온전기는 외환위기와 대우그룹 몰락, 장기 파업 등을 겪으며 2003년 5월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법정관리 상태였던 오리온전기가 새 주인을 만난 것은 지난 2월. 오리온전기의 부채 1조2천억원을 쥐고 있던 채권단은 6백억원을 받고 MP펀드에 이 회사를 넘겼다.

공적자금 날리고 직원들 밥줄 끊겨

당시 오리온전기의 최대 채권자였던 서울보증보험의 관계자는 “부채를 뺀 기업 가치만 1천8백억원이 넘는 오리온전기를 3분의 1도 안 되는 6백억원에 넘긴 것은 정책적인 결정이었다. 회사를 청산해 1천5백명이나 되는 근로자를 실업자로 내몰기보다는 공적자금에서 손해를 보자고 정책적으로 판단한 것이다(금융권의 채권은 공적자금이므로). 이 문제로 국무총리실에서도 회의가 여러 번 열렸다”라고 말했다. 당시 서울보증보험의 오리온전기 채권은 3천9백억원이었지만, MP펀드에 매각함으로써 회수한 돈은 19억원에 불과하다.

MP펀드가 인수한 순간 오리온전기에는 희망이 싹트는 듯했다. MP펀드가 ‘3년간 고용을 보장하고 제3자에게 회사를 양도할 경우에도 그 의무를 승계하겠다’고 노조와 합의했으니 적어도 3년 동안은 고용이 보장될 것이라고 직원들은 믿었다. 그러나 MP펀드는 새로운 경영 비전을 내놓는 대신 회사를 두 부문으로 쪼갰다.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사업부(오리온OLED)를 분사시키고, CRT 사업 부문(오리온전기)만 남겨두었다. 또 일부 부동산을 매각해 남아 있던 빚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3개월 만에 사양 산업인 CRT 사업부를 오션링크에 팔았다.

오션링크 역시 오리온전기를 회생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듯 인수한 지 5개월 만에 청산 결정을 내렸다. 경영 적자가 누적되어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는 이유다. 부동산 자산이 많은 오리온전기의 현재 장부상 기업 가치는 1천3백억원이 넘는다. 청산을 하더라도 오션링크는 7백억원 이상 손에 쥘 수 있다. 오션링크가 MP펀드로부터 오리온전기를 얼마에 인수했는지 알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MP펀드와 오션링크가 오리온전기를 이용해 얼마의 수익을 올렸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두 외국 자본이 오리온전기를 투자 대상으로 삼은 지난 8개월 사이 공적자금 1조원이 공중 분해되고, 수만 명의 밥줄이 끊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오리온전기 노조 류순열 수석부지회장은 “오리온전기와 정부는 외국 투기 자본에 당한 것이다. 우리 노조는 법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청산저지 투쟁을 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약속을 어긴 외국 자본을 제재할 법적 근거는 별로 없다. 한국은 외국 투기 자본에 얼마나 더 당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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