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맹이 된 화가 자폐증 앓는 디자이너
  • 표정훈(출판 평론가) ()
  • 승인 2005.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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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책] <화성의 인류학자>/신경과 의사가 쓴 별난 환자 이야기

 
미국의 신경과 개업의이자 대학 교수인 올리버 색스는 자신의 임상 경험에 바탕을 둔 특이한 소재의 책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책을 낼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베스트 셀러와 스테디 셀러를 여럿 내놓은 인기 저술가이기도 하다. 올리버 색스의 책이 우리 나라 독자들에게 그다지 널리 각광받지 못해 왔다는 점이 우리 출판계에서는 ‘풀릴 듯 풀리지 않을 듯한’ 미스터리(?)로 회자되기도 한다. 문화적 취향 차이 때문? 소재의 생경함 탓? 사회 환경이 달라서? 여하튼 이 책도 뇌신경 손상으로 범상치 않은 삶을 살게 된 일곱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물학자이자 가축 관련 시설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템플 그랜딘은 심각한 자폐증 판정을 받았지만 시지각 능력과 기억력은 천재급이다. 복잡한 기계를 머리로만 디자인하고 시뮬레이션 작업까지 하지만, 그가 디자인한 기계의 성능은 완벽하다. 자폐증 환자의 일부가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랜딘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읽는 능력이 제로에 가깝다. 사랑의 감정도 마찬가지. 책·영화·드라마 등을 통해서라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해 보려는 그랜딘의 노력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그런가 하면 교통사고로 갑자기 전색맹, 즉 흑백 사진을 보는 것처럼 명암이나 농담만 느낄 수 있고 색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I라는 사람이 있다. 식탁에서 소스의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이 모두 회색으로 보이니 그 고충, 아니 괴로움이야 일러 무엇하겠는가. 더구나 그의 직업은 화가였으니 전색맹이 그에게 안겨준 절망감의 깊이는 또 어떠했을지. 

저자는 자칭 ‘신경인류학자’

뇌종양 때문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레그라는 사람은 쉰이 넘은 나이인데도 20대를 보낸 1960년대만을 기억한다. 그 이후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으며, 새로운 기억을 축적하기도 여의치 않다. 박제된 시간 속에 사는 남자라고나 할까. 그는 자기가 장님이 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5분전에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물론 대화를 했다는 사실 자체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의 사례를 접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어 보인다. 사회적인 통념도 그런 사람들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외과의사로 활동 중인 베넷은 투렛증후군 환자다. 투렛증후군은 코의 경련과 얼굴을 찡그리는 현상을 포함한 안면경련, 머리경련, 발을 구르거나 몸을 꼬거나 구부리는 증세 등이 나타난다. 말을 이상하게 하거나 강박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베넷이 외과 수술을 준비하면서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은 과연 이 사람이 수술을 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하고, 수술팀의 다른 의사를 괜히 툭툭 건드리기도 하고. 그러나 베넷은 일단 수술에 들어가자 90분 동안 너무도 침착하고 자신 있게 수술을 집도했다. 신경장애를 겪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회에 잘 적응한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 저자는 과연 어떤 의사일까? 저자는 병을 치료하려면 병 자체가 아니라 병에 걸린 환자의 총체적인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지론을 실천하고 있다. 그는 병원 진찰실 대신에 환자들의 집으로, 직장으로, 심지어 여행지로까지 찾아간다. 올리버 색스는 그런 자신을 신경인류학자라고 자처한다. 낯선 세계에 뛰어들어 현지 조사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류학자. 올리버 색스는 ‘화성의 인류학자’인 셈이다.

 
그런 저자가 쓴 책이니, 신경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흥미거리로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병에 걸리면 생활에 한계가 생기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내가 만난 환자들은 거의 모두가 어떤 문제를 만났건 간에 자기가 처한 상황을 딛고, 심지어 자기가 처한 상황의 도움을 받아 삶을 향해 나아갔다.” 또 저자는 자폐증 화가 제시 파크를 찾아갔을 때 (타인과의 의사 소통과 상호 이해가 무척이나 힘든) 딸에게 큰 애정을 표현하는 그녀의 부모를 보고 부모에게 물었다. “따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피부로 느껴지던데, 따님도 부모님을 잘 따르나요?”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의 능력이 닿는 한도에서 최대한 우리를 사랑하고 있을 겁니다.” 정말 그렇다. 그들도 주어진 조건과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영화 제목이 생각난다. <그들도 우리처럼>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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