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공룡' 변신을 꿈꾸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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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녹지 개발 앞두고 올 봄 예술 무대화

 
지난 2월20일, 한가하던 세운상가 3층 동편 데크에서 난데없는 거문고 가락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우조, 우락, 계면조 편수대엽으로 이어지는 국악 가곡이 불려졌다. 그러나 고즈넉한 우리 선율은 쇠락한 콘크리트 건물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쌀쌀한 날씨와 주변의 소음도 감상을 방해했다. 몇몇 주변 상인과 행인들이 두리번거리기는 했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그러나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씨와 가곡 가창자 강권순씨는 전혀 실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단순히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황량한 상가에 아름다운 파열음을 내서 공간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강씨는 “시끄러운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공간인 세운상가 위에서 침묵을 지키며 과거를 기억하는 종묘를 바라보며 공연하는 것이 이채로웠다”라고 말했다. 허씨와 강씨는 이번 공연의 감흥을 담은 즉흥곡으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이날 공연은 ‘작은 소리 열린 공간(이하 열린공간)’이라는 단체에서 주관한 ‘오래된 상가에서의 잔잔한 잔치’ 가운데 하나였다. 이날 공연에 이어서 유경화씨의 철현금 연주, 김영재씨의 해금 연주, 이은관씨의 배뱅이굿이 벌어졌다. 처음 뜨악하게 지켜보던 상인들과 행인들도 점점 익숙해져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선율에 빠져들었다. 생태공동체 운동센터 황태권 대표의 야생초편지 삽화가 병풍처럼 둘러진 열린공간의 무대는 이들의 쉼터로 자리매김했다.

 
‘한평공원’이라 이름 붙여진 무대를 설계한 이영범 교수(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는 “무대와 객석 전체가 세운상가 상인과 행인들에게 또 하나의 무대가 된다. 그들은 이 행위 자체를 공연으로 바라본다. 상인들은 금방 여기에 익숙해졌다. 공연이 없을 때 윷놀이를 하는 등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에는 술과 음식을 준비해 와서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사람 냄새 풍기는 공간으로 재탄생할 듯

열린공간에서는 이 밖에도 세운상가와 관련한 전시회와 워크숍·세미나를 2월20일부터 28일까지 열었다. 행사를 기획한 프로그래머 김정희씨는 “변화를 앞둔 세운상가에 멍석을 깔고 예술가·전문가·활동가를 개입시켜보는 것이 이번 행사의 목적이다. 세운상가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을 확인하면서 다양한 생각을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열린공간은 지난해 말 워크숍을 통해 이번 행사를 준비해왔다.

김씨가 말하는 세운상가의 변화는 바로 재개발이다. 세운상가·대림상가·삼풍상가·진양상가로 이어지는 이 일대는 서울시의 녹지 축 확보 계획에 따라 헐린 후 녹지로 개발될 예정이다. 앞으로 세운상가는 헐려 종묘에서 남산을 거쳐 용산까지 이어지는 녹지 축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이처럼 조용히 퇴장을 준비하고 있는 세운상가에 예술가들이 끌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 후면 사라질 세운상가에 이들은 다양한 예술적 되새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열린 미술인회의의 미디어 예술장터 ‘세운상가 프로젝트’는 대표적인 세운상가의 예술적 되새김 작업이다. 줄잡아 3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한 이 작업은 ‘세운상가 키드의 하루’라고 명명되었다. 이 전시에서 예술가들은 세운상가가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를 되새겼다. 전시회를 기획한 조이한씨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발버둥치는 세운상가의 모습을 통해 근대화 과정의 양면을 살피려고 한다”라고 행사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들은 세운상가 기술자와 예술가의 만남을 꾀하기도 했다.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세운상가 기술자의 기술력을 이용해 구현해 본다는 것이다. ‘세운상가 상인들은 인공위성도 만들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응용력은 정평이 나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의 아이디어를 구현해 준 사람도 바로 세운상가에서 잔뼈가 굵은 이정성씨였다. 1993년 백남준 선생에게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을 비롯해 백씨가 구상한 많은 작품이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지금도 백작가의 작품은 그만이 수리할 수 있다.

세운상가 1층부터 4층까지 전 지역은 전시장으로 활용되었다. 가게의 복도와 쇼윈도가, 혹은 상품으로 진열된 텔레비전과 노래방 기기가 작품으로 응용되었다. 외벽을 이용해 설치 작품이 전시되었고 레이저 예술이 선보이기도 했다. 예술가들은 합법과 불법이, 진품과 복제품이 교차하는 세운상가에 덧씌워진 욕망의 화장을 지워 맨얼굴을 드러냈다. 

남대문과 명동에 상권을 빼앗기고 용산전자상가에 밀리면서 세운상가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40년의 세월은 최첨단 시설을 도심형 슬럼이 되도록 만들었다. 도시의 음부로 전락한 세운상가는 희한한 볼거리 혹은 은밀한 엿보기를 위한 도구를 매매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뉴스에 불법 도청이나 감청, 첨단기술을 이용한 시험 부정 이야기가 나오면 꼭 세운상가가 단골로 등장했다.

 
열린공간의 이번 작업은 쇠락한 ‘콘크리트 공룡’ 세운상가를 깨우는 것이 목적이다. 세운상가에서 사람 냄새를 풍기고 사람이 소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보행자를 위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설물로 만들어진 3층 데크가 청소년출입 제한 지역으로 묶여 있는 세운상가의 아이러니를 풀어내는 열쇠가 될 것이다.

워크숍과 세미나에는 일군의 생태론자들이 동참했다. 이들은 세운상가가 또다시 개발 논리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홍성태 교수(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는 “청계천 복원에 이어 세운상가 녹지개발 사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도심 고밀도 개발을 위한 수순 밟기처럼 진행되고 있어서 걱정이다”라고 지적했다. 

봄이 오면 세운상가가 푸른 빛으로 변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도시를 경작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도시농업위원회를 새로 만든 전국귀농운동본부가 세운상가를 전진 기지로 삼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텃밭 및 화단 가꾸기 작업을 통해 도시 경작의 전범을 세운상가에 만들 계획이다. 꽃 피는 봄이 오면 세운상가가 어떻게 바뀔지, 그 변화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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