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에 미친 10대들 자유를 향한 끝없는 몸짓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0.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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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면서 의기투합 동대문 등에서 열정 발산

귀를 찢을 듯한 음악 소리와 화려한 조명 사이에서 그들은 춤을 춘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쳐 보이지 않는다. 관객 100여 명이 언제라도 박수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버스 승객들도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교통 경찰 역시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춤이 끝나자 오빠부대의 자지러질 듯한 함성이 터졌다. 이것은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인기 가수의 공연이 아니다. 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동대문 밀리오레 그 밤의 해방구 10대들의 몸의 천국에서 매일밤 벌어지는 춤판 풍경이다.

10대 춤군들의 메카 동대문
지난 8월24일 벌어진 밀리오레 개업 2주년 기념 댄스 콘서트장은 열기로 가득 찼다. 쏟아지는 비도 10대들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이날 공연은 그동안 밀리오레 무대에 섰던 10대 춤꾼들이 자신의 모든 기량을 보여주는 축제였다. 베이비 페이스가 무대를 열었다. 여자 고등학생4명이 만든 팀이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았던 가수의 백댄서와 똑같은 춤실력이었다.

두 번째 공연은 힙합 대싱 팀인 헝그리와 용병팀의 배틀이었다. 이들은 춤대결을 팀배틀이라고 부른다. 헝그리는 B-boy(브레이크댄스를 추는 남자)8명으로 구성되었고 용병팀은 이 날 특별 공연을 우해 급조 되어다. 각자 대학로에서 활동하는 춤꾼들이다. 베이비 페이스와 달리 헝그리는 정통 힙합 춤을 구사한다. 우산을 받쳐든 10대 구경꾼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베틀이 시작되었다. 먼저 헝그리 멤버가 업락(서서 하는 브레이크 기본 스텝)과 풋워크(손으로 바닥을 짚고 하는 기본 동작)으로 탐색전을 벌였다. 그러자 대학로 용병팀은 과감히 위드밀으 선보이며 초반 기세를 잡았다. 위드밀이 연속되자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용병팀의 춤이 먹혔다.(압도했다.)

느긋했던 헝그리는 탐색전 없이 본 게임에 들어갔다. 헝그리 멤버 중 가장 나이 어린 박근오군(15 중학1년)은 토마스로 구겨진 기세를 올렸다. 그러자 용병팀은 곧바로 토마스와 터클을 연결하는 기술로 전투를 이어갔다. 헝그리 리더 이종남씨(20)는 팀의 에이스인 한재권군(17)을 내세웠다. 한군의 장기는 헤드스핀 그는 1백50번 회전이 가능한 헤드스핀의 1인자이다. 그는 달걀형 큰 대자 V자를 만들며40회가 넘는 헤드스핀을 보여주었다. 아저씨 아줌마 들까지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다.

헝그리 동료들은 헤드스핀이 꽂혔다.(춤이 제대로 되었다)며 한재권군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내친 김에 리더 이종남씨는 힙합 중 가장 어려운 기술인 에어트랙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려 했다. 하지만 용병팀의 히든 카드는 따로 있었다. 그의 에어트랙이 끝나자마자 용병팀의 김용학군(18)은 에어트랙의 진수를 선보였다. 결국 이날 한판 벌어진 베틀은 헝그리가 밀린 채 끝났다.

열띤 춤 대결에 아저씨 아줌마들도 환호
공연의 마지막은 가장 많은 소녀팬을 확보한 LD-STORN이 장식했다. 유승준의 <나나나>를 리믹스한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한 9명의 10대들 이들은 춤추는 중간중간 시선을 마주치며 웃음을 건넸다. LD-STORN의 이상욱군(17)은 공연을 마친 느낌을 이렇게 전했다. 춤추고 나면 기분이 짱 (최고)이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힘들지만 뿌듯하다.

관객들은 모두에게 박수를 보냈다. 교복차림인 박세은양(17 고교1년)이 공연을 보며 유난히 환호했다. 세은이는 지하철에서 헝그리를 보고 너무 멋있어서 동대문까지 무작정 따라왔다. 나도 기회만 되면 춤을 추고 싶어요 헝그리 뿅 갈 정도로 멋있어요.

동대문을 10대 청소년이 점령한 것은 1998년 밀리오레 두타와 같은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부터다 밀리오레와 두타 앞에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무대에서 갖가지 행사가 벌어진다. 특히 밀리오레 무대는 10대들의 춤판이 월요일을 빼놓고 매일 밤 8시부터 11시까지 열린다. 동대문은 10대들의 왕성한 소비 지역인 동시에 문화 생산지 구실도 하고 있다.

밀리오레 쇼핑몰 운영이사회 신정운 총무(31)는 우리는 공간만 제공한다. 이곳을 채우는 몫은 댄스팀이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현재 동대문과 명동 밀리오레 무대에는 18개 팀이 오른다. 지난 6월 명동 밀리오레가 생기면서 9개 팀씩 번갈아 공연한다. 공연 대가로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매일 식권5천원짜리 한 장과 1주일 교통비 1만5천원 정도다. 형편없는 대우이다. 하지만 이들은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보수라고 말한다. 신정운 총무는 비가와도 공연하겠다는 열성 춤꾼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라고 말했다.

10대들 사이에 춤바람이 거세지면서 춤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된 경우도 많다. 밀리오레에서 공연하는 히카루도 춤이 끈이 되었다. 지난 7월 초에 결성된 히카루는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힙합을 주제로 채팅을 하다가 의기 투합했다. 분당 구로 송파 등 서로 사는 곳은 다르지만 이들은 춤을 추기 위해 늘 모인다.

여고생으로 이루어진 히카루는 본격적인 춤 연습을 위해 서울 송파동에 월 20만원을 내고 연습실을 마련했다. 지하 1층인 연습실은 환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역겨운 냄세가 난다. 그래도 이들은 여름방학 동안 피서도 마다하고 춤을 연마 했다. 방학 때는 일어나면 밥 먹고 씻은 다음에 곧장 연습실에 모였다. 선풍기 한 대로 더위를 이겨내며 구슬땀을 흘린 덕분인지 7월말부터 꿈에 그리던 밀리오레 무대에 올랐다.

히카루 멤버인 정소연양(18 고교2년)은 처음 만난 사이지만 춤 덕분에 쉽게 친해졌다. 지금은학교 친구들 보다 더 친하게 지낸다라고 말했다. 지난 8월23일 이들은 오후 6시에 연습실에 모였다. 개학 때문에 연습 시간을 조정한 것이다. 전날까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던 정양의 머리 색깔이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개학 때문에 연습 시간은 짧아졌지만 이들은 계속 밀리오레 공연에 나갈 작정이다. 리더 박은경양(19 고교3년) 은 이제야 꿈을 일루었다. 앞으로도 춤을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B-boy팀 헝그리 역시 춤을 추면서 한 두 명씩 늘어난 경우이다. 헝그리는 연습실을 구하지 못해 전철역에서 주로 연습 한다. 지난 8월25일 헝그리는 노원역에 모였다. 모두 교복 차림이었다. 전날의 고배를 만회하려는 듯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모였다. 토마스를 해냈던 박근오군은 영광의 상처를 달고 나타났다. 박군은 어깨살이 패여 나가 병원에 들렸다 오은 길이었다. 끊임없이 행인들이 지나쳐 가는데도 이들은 개의치 않고 힙합 음악에 맞추어 개인기를 다졌다.

리더 이종남씨는 다른 역에 비해 단속이 심하지 않다. 노원역에서는 세 팀 정도 춤 연습을 한다라고 말했다. 주말에는 밤 12시부터 새벽까지 연습하기도 한다. 그는 우리에게는 통하는 것이 있다. 함께 춤을 추면 서로를 알게 된다라고 말했다.

LD-STORN의 정재호군(19)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학교 공부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 시간에 춤을 추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공부로 성공하지 못할 바에야 좋아하는 춤을 평생 추고 싶다는 것이다. 대학로 댄싱팀인 아웃사이더 B-boy 김용학군도 중3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역시 춤으로 성공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지금은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루었다. 마스코트 김지민씨(21)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 했다. 그는  고향이 광주인데 춤을 추기 위해 부모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왔다. 그는 지금도 춤으로만 먹고 산다.    

춤 못추면 왕따
10대들에게 춤은 공부를 그만두고 집을 뛰쳐 나올 정도로 강력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춤을 추는 10대들은 대부분 친구를 통해 춤을 처음 접한다. 춤은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는 수단이다. 예전에는 공부를 잘하거나 싸움질에 능한 학생이 짱을 했다면 이제는 춤을 잘추어야 10대들 사이에 인기가 폭발한다. 춤을 못추면 10대 사이에는 몸치나 춤치로 통한다. 노래 못하는 사람을 음치라고 부르듯이 춤을 못추면 춤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춤치들은 왕따당하기 쉽다.

LD-STORN의 공연을 지켜본 조미순양(17 고교1년)은 같은 또래인데도 이들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조양은 이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매일 동대문에 온다. 그녀는 인기 가수들은 보고 싶어도 실제로 못 만난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든지 직접 만나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좋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기도 곧 밀리오레 무대에 오른다고 했다.

춤을 추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뿐 아니라 자신감이 생기는 것도 춤에 빠져들게 하는 요인이다. 성남에서 활동하는 AIR 리더 서 영씨(20)는 춤을 배워 가면서 실력이 느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고 했다. 그녀는 공부를 못하면 그만 이라는 생각을 벗어던질 수 있었던 것도 춤 덕분 이었다라고 말했다.

천애비린의 나현주양(17 고교1년)은 무대에 올라 많은 사람 앞에서 춤추면 마치 내가 스타가 된 듯한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대학 때부터 본격적으로 춤판에 뛰어든 이경민씨(21)도 춤을 추면서 나를 보여줄 때가 가장 즐겁다라고 말한다. 이들의 우상은 인기가수보다 백댄서팀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활동하는 미리내 멤버 강기택군(18)은 프렌즈를 우상으로 삼는다. 프렌즈는 가수 엄정화의 백댄서다. AIR의 서 영씨는 가수 백지영의 안무가를 본받고 싶다고 했다.

춤에 미친 10대들도 굳은 결심 없이는 춤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최근 들어 댄스팀을 동아리로 인정하는 학교가 늘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춤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특히 여학교는 더욱 심하다. 부모님이야 설득할 수 있지만 학교에는 비밀로 하고 무대에 오르는 학생들이 많다.

무엇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춤을 통한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게 한다. 베이비 페이스의 장현주양(17 고교 1년)도 올해 까지만 밀리오레 무대에 설 작정이다. 내년에는 공부를 위해 잠시 공연을 중단할 계획이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춤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이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춤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신 없어 했다.

오늘밤도 동대문에서는 춤판이 벌어진다. 동대문을 점령한 10대 춤꾼들에게 춤은 또래 집단을 묶어주는 언어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춤으로 통한다. 그래서 즐겁다. 그들에게 왜 춤을 추느냐는 질문은 우문이다. 왜 춤을 추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그냥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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