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만 한도 풀어달라”
  • 오사카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0.09.2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총련계 재일 동포 고향 방문 학수고대

이산가족들의 8.15 상봉을 KN 텔레비전(일본에서 방영되는 한국어 케이블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재일 동포들은 재회 한 가족들이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민단 기관지인 <민단신문>과 조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도 55년 간의 벽을 넘은 8.15 상봉을  대서 특필하며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70만 재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는 제각기 이산가족의 한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 인근 사이타마 현에서 환경사업을 하고 있는 재일 동포 홍영기씨(53)는 남북한과 일본에 가족과 친척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재일 동포 사회의 전형적이 이산가족이다.

광복 직후 제주도에서 태어난 홍영기씨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광복과 함께 제도로 귀향한 부모가 돈벌이를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자 부모를 찾아 형과 밀항선을 탄 것이다. 밀항후 조총련이 운영하는 고베의 조선 중고급학교에 입학한 홍영기씨 형제는 제주도와 전혀 다른 일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제주도로 돌아갈 날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재일 동포 북송사업이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에는 광복 전 청진조선소에서 근무하다 눌러앉은 작은아버지 일가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홍영기씨의 형님은 지겨운 일본 생활을 청산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고모 일가와 함께 북송선을 탔다. 홍영기씨는 북송선을 타고 떠나는 형님에게  10년만 지나면 통일될 테니까 그 때 다시 만나자라고 가벼운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도 두 형제는 직접 대면할 길이 없다. 홍영기씨가 민단에 속해 있기 때문에 조총련 동포들처럼 만경봉호를 타고 형님을 만나러 북한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민단계 방북도 허용해야
1959년 말부터 시작된 재일 동포 조국귀환사업에 따라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간 사람은 모두 9만3천여명에 이른다. 일본 정부는 1971년부터 조선(북한)적을 갖고 있는 재일 동포가 북한을 방문하고 재입국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에 따라 조총련은 1979년부터 조국 방문단 사업을 시작 했으며  조총련계 동포는 조국방문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들어가 북송된 가족을 만나고 있다.

민단계 재일 동포로서 북한 입국이 허용된 사람은 지금까지 수백 명에 이르고 있으나 그들의  대부분은 통일교 신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홍영기씨는 조총련계 재일 동포의 한국 방문이 실현되면 당연히 민단계 재일 동포의 북한 방문도 허용되어야한다라고 지적하면서 본국 정부가 이 문제에 좀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조총련계 재일 동포도 지난 7월 말 서울에서 열린 1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합의된 고향 방문이 하루바삐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다.

일본 법무성 통계에 따르면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 동포는 63만9천여명에 이른다. 이가운데 민단계 대일 동포가 46만3천여명이고 조총련계 재일 동포가 약 17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 동포를 출신지 별로 구분하면 경상도가 약57% 제주도가 약 17% 전라도가 약 10%이며 북한 출신은 0.6%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조총련계 재일 동포 17만명의 대부분이 이산가족인 셈이다.

물론 이 중 5만여명이 1975년부터 시작된 민단의 모국 방문단 사업에 따라 한식과 추석 때 남한의 고향을 방문하고 성묘를 마쳤기 때문에 조총련계 재일 동포 중 3분의 1은 이미 이산가족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

러나 남한의 고향을 방문한 조총련계 동포대다수는 이른바 조총련의 비전임 요원이고 조총련 조직에서 일라고 있는 전임요원의 고향 방문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때문에 조총련 기관지<조선신보>가 호외를 발행하여 고향 방문에 합의한 사실을 알렸을 정도로 조총련계 재일 동포가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이루어진 합의에 거는 기대는 크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