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미 잡힌 ‘두 얼굴의 사나이 ’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2000.09.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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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화방송 명PD 오창규씨 직장내 성희롱 파문

지난 8월20일 인터넷 신문인  <오 마이 뉴스> 게시판에는 제2의 장 원 사건! 이라는 제목의 이례적인 폭로 문건이 실렸다. 실명을 밝히지 않은 채 크레모아 라는 인터넷 ID를 쓴 이용자는 광주문화방송의 한 PD가 지난해초부터 올해 7월까지 전,현직 여성 구성작가와 리포터 실습생 신분의 프로그램 출연자 등 모두 6명을 성희롱한 사례를 공개하며 네티즌들에게 여론화를 요청했다. 이들 피해 여성은 사전에 광주 지역 여성단체를 방문해 상담을 거쳤고 이미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에 구체적인 살례를 담은 진정서와 시정신청서를 올린 뒤였다. 여간해서는 소문조차 나돌지 않기 마련인 방송계의 내밀한 성희롱 문제가 피해 여성들의 용기 있는 문제 제기와 여성단체들의 도움을 통해 공론화한 것이다.

피해 여성들이  인터넷 통해 고발
다음날인 21일 광주문화방송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저로 인하여 상처를 입으신 당사자 여러분께 무릎 꿇어 사죄합니다. 인터넷에 오른 글의 모든 내용을 시인하며 하늘 아래 머리를 둘 수 없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라는 오창규씨(44 광주문화방송 편성국TV부장대우)의 사과문이 올랐다. 광주문화방송(사장 박진홍)은 이 날 오창규 PD의 사표를 즉각 수리했다. 또 홈페이지 시청자 의견 난에 임직원 일동 명의로 피해자와 지역민들에게 진정으로 사과드린다는 내용도 실었다. 패해자들이 인터넷에 공개한 성희롱 공개 고발이 겨우 하루 만에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성희롱 사건을 시인한 오창규 PD는 광주지역 방송계와 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전국 방송노조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였던 까닭에 특히 파문이 컸다.(위 상자 기사 참조)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사례 4건에 따르면 오창규씨는 친절하고 자상한 상사의 이미지로 접근한 뒤 좋아한다 사랑한다라며 전화와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통해 사적인 만남을 강요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밤낚시에 동행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한 뒤 피해 여성들을 껴안거나 키스하고 몸을 더듬었다. 교제 요청을 거절하는 피해자에게는 은밀한성관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오씨는 대학시절부터 함께 연극운동을 하던 부인과 결혼해서 두 자녀를 두고 있다. 한편 피해 여성 6명은 모든 비밀이 드러나자 함께 모여 대책을 논의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피해 여성 가운데는 성희롱 수준을 뛰어넘어 아예 수개월 동안 성적 대상물로 유린당한 이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한 인간을 파멸시키려는 것도 굳이 법적인 처벌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 공론화를 통해 당사자가 잘못을 깨닫게 하고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들은 광주문화방송의 공식 사과와 직장내 성희롱 근절 대책 마련도 함께 촉구했다. 행위자에 대한 처벌보다는 당사자의 반성과 풍토개선을 요구한 것이다.

여성단체들은 성희롱 예방 풍토 마련 등 구조 적인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사단법인 광주 전남 여성단체연합(대표 이명자)은 8월21일 기자회견을 통해 직장내 상하 관계를 이용해 직장에 갓 입문한 여성을 대상으로 지속적이고 상습적으로 진행된 성추행 강간은 오PD의 그 동안의 사회적 공헌을 생각할 때 더욱 분노를 자아내게 한다라며 성희롱 사실을 공개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고용상의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도록 광주문화방송이 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여성단체연합은 또 직장내 성희롱 예방에 대한 여건을 조성하지 않았다(남녀고용평등법 제 8조 2항 위반)는 이유로 지난 8월24일 광주문화방송 사업주를 광주지방노동청에 고발했고 광주MBC오창규PD 직장내 성희롱 대책위원회 까지 구성해 광주문화방송의 자체 진상 조사와 공개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진정서를 접수한 대통령 직속 여성특위 역시 직장내 성희롱 문제를 제대로 예방하고 대처했는지 광주문화방송을 방문해 현장 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방송사측 사건 축소하기 바빠
여성단체들이 이처럼 직장내 성희롱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대책을촉구하고 나선 것은 광주문화방송이 근본적인 개선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사태를 서둘러 봉합하기에 급급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 광주문화방송은 8월21일 오창규PD의 사표를 수리한 뒤 광주 전남 지역 유력 언론과 방송에 보도 자체를 요청하며 사건을 축소하기에 바빴다. 1년에 한 차례 이상 전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하도록 하고 있는 성희롱 예방 교육도 8월 24일에야 직원 수십명만 참석시켜 형식적으로 치렀다. 도 사건 초기 성희롱 사실을 익명으로 공개한 여직원들을 색출하려고 시도하다가 피해 여성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그만두기도 했다. 성희롱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 예방하기보다는 방송사의 권위와 이미지유지에 더 매달렸던 셈이다.

이번 파문은 특히 성희롱 문제에 취약한 방송계의 자정을 촉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방송계 주변에서는 업무와는 상관없는 회식이나 술자리에 여직원을 불러내 옆에 앉히고 술을 따르게 하거나 언어 성희롱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많았다. 이와 관련해 오창규PD의 성희롱 사실을 공개한 피해자는 불유쾌하게 여직원들이 꼭 기생처럼 술을 따라야 하는 자리에 불려갔다는 내용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광주문화방송의 경우 한 계약직 여사원이 정규직 채용을 조건으로 간부로부터 노골적인 성 상납을 요구받았으나 끝내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연히 여론은 여성 작가들에 대한 성희롱 문제에 둔감한 지역 방송사는 광주문화방송뿐만이 아니지 않겠느냐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광주문화방송의 한 사원은 이와 관련해 유례 없는 성희롱 사건을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계기로 삼기보다는 사건 피해자가 누구인지에 호기심을 갖거나 금방 잊힐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젖어 있는 이들이 아직 많다라고 털어놓았다. 외부 여론은 들끓고 있지만 정작 방송사 내부에서는 얼만든지 있을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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