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DJ 깃발 꽂아도 안 통해”
  • 광주. 나권일 기자 ()
  • 승인 2000.04.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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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지역 무소속 후보 대거 당선.... ‘낙선운동 + 인물론“ 상승 작용

‘공천=당선’으로 통하던 호남 지역 선거판이 한순간에 뒤집혔다.  413 총선에서 민주당의 텃밭인 호남 지역구 29석 가운데 4석을 무소속 후보가 거머쥐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김대중 정권 하반기의 정국 안정을 위해 비례대표를 1석이라도 더 늘리려고 민주당에 몰표를 달라면서 유권자들의 뿌리 깊은 관성에만 의지했던 민주당으로서는 가슴 아픈 패배가 아닐 수 없다. 때문에 호남 무소속 후보가 대거 당선한 것은 공천 부적격자를 공천하고 텃밭의 이상 기류를 애써 외면한 민주당의 자충수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따라서 권노갑 고문을 비롯한 당내 실력자들은 밀실 공천 관행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무소속 돌풍을 몰고 온 호남 지역 유권자들의 의미 있는 변화는 사실 총선 이전부터 감지되었다. 선거를 앞둔 여론조사에서 정당보다는 인물을 보고 투표하겠다는 유권자가 대다수를 차지했던 것이다. 여기에 공천 경쟁에서 탈락한 경쟁력 있는 후보들이 출마를 강행해 ‘무소속 벨트’를 형성 하면서 선거판이 변화할 가능성을 예고 했다.  ‘광주  전남 정치개혁 시  도민연대 “ (시도민연대  상임대표 송기숙)와 전북 총선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이러한 기류를 등에 업고 3개원동안 대대적인 낙천  낙선 운동을 벌였고, 지역 언론과 방송 역시 변화의 기류를 집중 부각했다.

 그 결과 이번 총선에서는 시도민연대가 선정한 낙천  낙선 대상자 8명(김봉호 나창주 박상천 신순범 이영일 이재근 임복진 한영애)가운데 박상천 의원을 제외한 7명이 낙선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광주 남구 월산동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나순옥씨(44)는 “손님들 대부분이 더 이상 외곬로 민주당만 찍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물도 좋았지만 이번에는 바꿔보자는 낙선운동에 대한 남구 주민들의 호응이 컸다”라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바꿔’열풍이 수도권과 함께 호남 지역에서 맹위를 떨친 것이다.

 특히 호남 지역 총선의 최대 이변은 해남  진도군에서 일어났다. 시민단체의 대대적인 낙선운동으로 국회 부의장이자 민주당 후원회장이라는 막강한 힘을 보유한 김봉호의원이 낙마하고, 정치신인 이정일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시도민연대는 해남농민회와 해남전교조 등 9개 단체가 참여한 ‘해남 군민 연대’ 와 ‘진도 사랑 연대회의’등 풀뿌리 지역 시민단체와 유기적으로 결합해 대대적인 낙선운동을 벌였다.
 
386 무소속 후보들도 ‘동반 약진’
 해남 군민연대 한경진 집행위원장은 “전화를 통한 낙선 운동 과정에서 면 지역의 시골 할머니들조차 이번에는 바꾸자는 의견에 공감했다. 낙선운동이 성공하지 못하면 해남  진도 사람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느냐며 지역민의 자존심을 보여주자는 사람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수성이 가능할 것으로 점쳐졌던 20년 ‘쌀봉호 왕국’도 바꿔 열품 때문에 이미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 남구와 화순  보성 역시 낙선운동이 인물론과 결합해 성공을 거둔 지역으로 꼽힌다. 광주 남구의 강운태 당선자는 내무부장관과 광주시장을 역임한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하여 지역구 관리 부실로 시도민연대의 낙선 대산자 명단에 오른 임복진 후보를 초반부터 여유있게 따돌리면서 승리했다. 화순  보성의 박주선 당선자도 인물론 에다 낙선운동의 도움으로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시도민연대는 화순과 보성  벌교 지역에서 여덟 차례 거리 집회를 통해 낙선운동 바람을 일으켰고, 화순과 보성의 농민회  전교조 등과 결합해 면 지역 중장년층 유권자들의 민주당 선호 심리를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 ‘국회의원의 품위를 거스르는 발언과 행동’으로 낙선 운동 대상에 오른 한영애 후보는 2년 전부터 조직을 구성해 공을 들여온 화성 보성 지역에서 결국 낙마하고 말았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호남 지역 출신의 대대적인 지원 공세도 무소속 돌풍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인물론에서 비교 우위를 보인 박주선 당선자와 남원  순창 이강래 당선자의 경우,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향우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고향을 방문하거나 친인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호남 지역민의 자존심’을 강조하며 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하라고 설득했다. 막판에 민주당 후보를 찍는 관성을 보였던 호남 사람들이 친인척들의 설득에 상당 부분 공감했다는 얘기다.

 아울러 공천 과정에서 잡음을 빚었던 전주고 출신 조찬형  장성원김태식 장영달 의원의 부진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조찬형 의원은 ‘밀실 공천’ ‘치맛바람 공천’을 집요하게 공격했으나 인물론으로 파고든 이강래 당선자에게 덜미를 잡혀 3선 문턱을 넘지 못했고, 김제의 장성원 의원도 무소속 이건식 후보에게 추격당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다. 전북총선연대의 낙선운동에 시달린 임실  완주의 김태식 의원이나 전주  완산의 장영달 의원 역시 득표율이 낮아 전북 지역 민심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낙선운동과 인물론의 상승 효과를 발휘한 무소속 돌풍과 함께 386 무소속 후보들의 약진도 호남지역 총선의 중요한 번화로 거론된다. 순천 지역의 신택호 후보는 김경재 의원에 맞서 40%에 육박하는 득표율을 기록했고, 광주 북 갑의 강기정 후보는 박광태의원에 이어 2위를, 전대협 의장 출신인 광주 남구의 송갑석 후보는 3위를 기록해 17대 총선에서 선전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무늬만 무소속” 평가절하 시각도 이밖에 ‘즐겁게 투표할 수 있는 인물’ 에는 확실하게 몰표를 주는 호남 지역민들의 특성이 이번에도 전국 최다 득표(98,746표, 전주 덕진 정동영의원)와 전국 최고 득표율(92.4%, 전남 담양  장성 곡성 김효석 당선자)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지역구 4석을 잃었지만 친여 무소속이 당선한 것이라고 평가 절하하는 시각도 있다. 무소속이 대거 당선했으나 내용 면에서는 여전히 호남 싹쓸이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실제 무소속 후보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민주당 입당 원서를 제출했고, 민주당 역시 여론 때문에 서두르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선거운동 관정에서 표명했던 ‘입당 불가’ 방침은 이미 접어놓은 상태이다. 때문에 민주당이 실제로는 ‘명분도 얻고 실리도 얻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역주의 투표가 허물어지는 계기를 마련해 영남 지역을 싹쓸이한 한나라당보다 명분에서 앞서게 된 데다. 무소속 4명이 입당해 지역구 29석 모두 민주당이 가져가는 실속을 챙겼다는 것이다.

 여기에 호남 지역민들이 무소속 후보를 당선시킨 것도 ‘DJ를 위해 누가 더 일을 잘 할 수 있느나’를 보고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에 변함없는 ‘DJ지지’ 투표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 인물론을 들고 나온 이강래 당선자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며 유권자들의 DJ 선호 심리를 파고들었고, ‘현대판 조광조’임을 내세운 박주선 당선자 역시 대통령의 곁에서 개혁 정치를 보좌하다 억울하게 낙마했다면서 자신의 대통령을 보좌할 적임자임을 강조했다. 전국 최고득표율을 기록한 김효석 당선자 또한 김대중 대통령이 ‘능력있는 정보통신 전문가’로 거론한바 있다.

 결국 DJ지지 성향의 호남 유권자들에게는 역시 DJ가 만병통치약이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호남 지역에서 무소속 대거 당선과 민주당 지지율 하락은 요지부동의 철옹성으로만 보였던 ‘공천 = 당선’ 등식이 허물어지는 이변을 유권자들이 직접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변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시도민연대의 낙선운동을 주도한 정찬용 광주 YMCA 사무총장은 “낙천  낙선 운동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의정 활동을 평가하고 개혁 정치를 요구하는 감시 활동을 계속하겠다”라고 말했다. 호남 지역에서 성공적인 낙선운동을 넘어 성공적인 정치 개혁 촉구 운동이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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