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日 새 인맥찾기 ‘속도전’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2.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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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마루·다나베 線에 한계…배상·경협 위해 대장성 등 탐색

  데탕트 물결을 타고 일본에서 급격히 ‘북한러시’ 현상이 일어난 것은 70년대 초반이었다. 그 북한러시 현상이 20년 후인 90년대 초반, 일·북수교를 앞두고 다시 불어닥치고 있다.

  북한 로동당의 ‘최대 友黨’으로 자처하고 있는 사회당이 1백12명, 집권 자민당이 28명의 대표단을 15일 金日成 주석의 80회 생일 축하연에 파견키로 결정함으로써 “한 나라에서 파견된 축하사절로서는 유례가 없는 규모”라고 북한당국을 감격하게 했다. 특히 국회의원 지방의회의원 노조관계자로 구성된 사회당 사절단은 평양방문중 로동당과 3천명 연대집회를 개최하여 북한 로동당의 변함없는 우당임을 다시한번 강조한다.

  일본 사회당이 북한 로동당의 우당으로 자리잡게 된 역사는 그렇게 긴 것이 아니다. 60년대말까지 북한 로동당의 파트너는 일본 공산당이었으며, 그 영향 아래 있던 ‘일·조협회’가 일본의 북한인맥을 좌우하고 있었다.

  일본 사회당이 북한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게 된 것은 70년. 그해 8월 당시의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이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 주석과 회견한 이후부터다. 소련·중국·북한의 공산당이 일본 공산당과 노선대립을 벌이다 결별하자 사회당이 그 틈새를 비집고 접근한 것이다. 나리타 위원장은 이때 북한 로동당과 일본 공산당이 결별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인 ‘일본 군국주의는 부활했는가’라는 논쟁에서 북한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일·북 국교정상화를 김주석에게 제의하기도 했다.

 

  다시 불어닥친 일본의 ‘북한 러시’

  이어 72년 김주석이 회갑을 맞이하자 당·노동조합·상하단체를 동원, 대량의 생일선물을 북한에 보내 추파를 던졌다. 또 사회당은 로동당을 확고한 우당으로 붙들어매기 위해 74년 종래의 남침설을 북침설로 수정하고 “한국동란은 미군의 침략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사회당의 북한 접근이 노골화된 이후 일본 속의 북한인맥도 사회당 계열로 대체되었다. 사회당이 공산당 계열의 일·조협회에 대응하기 위해 71년 11월에 발족시킨 것이 ‘일·조우호촉진의원연맹’이었다. 이때 회장으로 자민당 ‘아시아·아프리카연구회’, 일명‘AA연구회’멤버였던 구노 주지 의원을 내세웠지만 실은 사회당이 좌지우지하는 단체였다.

  이어 ‘일·조노동자교류연대연락회’(72년 12월) ‘일·조우호연대국민회의’(73년 9월)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 지지 일본위원회’(76년 6월) 등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이와 함께 사회당 계열의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 내지는 ‘진보적 문화인’의 북한 찬양 발언도 잇따랐다. 요미우리신문 논설위원 다카키 다케오, 전 아사히신문 기자 가지타니 요시히사, 참의원의원 덴 히데오(사회당), 법정대학 교수 야스이 가오루와 같은 사람들이 “조선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 “공화국(북한)은 남침의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친북성향의 발언을 되풀이했다.

  특히 이 무렵 이른바 ‘이와나미 인맥’에 속하는 진보적 문화인들의 친북발언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와나미 인맥이란 ‘이와나미(岩波) 서점’이 1946년부터 발행한 월간지 《세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좌파 지식인그룹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74년 한해 동안 84편에 달하는 한반도 관계기사를 기고하면서 북한을 ‘지상의 낙원’으로 선전했다.

  그 중심인물인 야스에 료스케 이와나미서점 사장은 작년 9월 북한 강계에서 김주석과 4번째 단독으로 회견하고 그 회견기를 《세계》 12월호에 게재하는 등 아직도 문화계 북한인맥의 중심 존재로 활동하고 있다. 혁신계 미노베 료키치 도쿄도지사의 비서를 지내기도 했던 그는 또한 《세계》에 71년 5월부터 88년 3월까지 ‘한국통신’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줄기찬 한국 비방을 펼쳐왔다. 이 칼럼은 ‘TK 生’이란 필자가 모두 1백76회에 걸쳐 집필했는데, 아직도 그 ‘TK 生'의 정체를 둘러싼 공방이 일고 있다. 이 칼럼의 영향으로 “일본인의 한국인식이 10년은 늦어졌다”는 비난도 가해지고 있다.

 

이와나미(岩波) 인맥, ‘전향’ 또는 ‘침묵’

  ‘현대 코리아’의 사토 가쓰미 소장은 “이전의 공산당계 문화인에 비해 새롭게 등장한 사회당계 문화인의 사회적 지명도가 더 높았기 때문에 그들의 북한찬양 발언은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북한 로동당과 조총련의 대일공작이 가장 성공했던 시기가 바로 70년대 중반이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조총련의 대일공작 총책임자는 金炳植 제1부의장이었다. 그는 제국호텔 스위트룸에 거점을 만들어놓고 대일공작을 지휘했는데, 조총련 의장직을 둘러싼 권력투쟁에 패해 73년 강제소환 조처를 당했다. 이때 그가 대일공작으로 뿌린 자금이 엄청났다는 것은 그가 사용한 금액 중 사용처가 명확하지 않은 돈이 3억엔에 달했다는 조총련의 자체조사 결과가 증명하고 있다.

  그의 밑에서 재계·노동계 공작을 전담했던 사람이 조총련 국제국의 許宗万 현 부의장이었고, 사회당 담당은 역시 국제국 소속 文性洙(사망)였다. 이들은 자금과 북한 초청을 무기로 사회당과 노조총평을 중심으로 노동계에 깊숙이 파고들었는데, 조총련의 대일공작은 지금도 국제국이 담당하고 있다.

  조총련의 사회당 공작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수많은 외곽단체가 조직되었다. 릿쿄대학 이노우에 슈하치 명예교수가 이사장으로 있는 ‘주체사상국제연구소’, 작년 9월 보천보경음악단을 초청한 ‘일·조문화교류협회’(이사장·하야시 료소 다이쇼대학 학장) 와 같은 데가 지금도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는 어용단체들이다.

  또한 일본 내각조사실이 펴낸 한 보고서에 의하면 80년대 초반 북한을 자주 드나들었던 단체로서 ‘일본화이트라인’ ‘김일성 주석 저작학습회’ ‘일·조학술교류협회’ ‘일·조농민우호교류협회’ ‘일·조사회과학자연대위원회’ 같은 정체불명의 단체가 눈에 띈다.

  그러나 사회당이나 진보적 문화인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대일공작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는 없다. 우선 사회당 자체가 ‘만년 야당’에 머물고 있어 그 영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89년의 ‘빠찡코 의혹사건’이나 ‘후지산마루 선원 석방문제’ 등은 사회당의 한계를 양면에서 보여준 좋은 예이다. 일본 국회에서 조총련을 위험단체로 규정하고 조총련 공격이 시작되었음에도 사회당의 비호는 최소한도에 그쳤다. 조총련에 대한 비호가 곧 자기 당과의 유착관계를 증명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후지산마루의 선장과 선원이 석방되는 데는 무려 6년10개월이 소요되었다. 그것도 가네마루 신이 직접 평양에 들어가지 않았던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또한 진보적 문화인의 ‘전향’도 북한의 대일공작 입지를 좁히고 있는 요인이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월간지《세계》가 한국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한국통신’의 게재를 중지한 것은 이미 4년 전이고, 이와나미 인맥의 좌파 지식인들도 최근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전향을 서두르고 있다.

 

북한의 대일공작, 자민당·재계에 집중

  작가 오다 마코토의 경우도 그렇다. 이와나미 인맥에 속하는 대표적인 문화인이었던 그는 76년 11월 김주석을 면담할 정도로 친북성향을 지닌 작가였다. 그러나 제주도 출신인 재일교포 아내와의 생활을 그린 〈어머니 태평기〉가 한국에서 출판되는 것을 계기로 4월중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따라 북한과 조총련의 대일공작 초점은 최근 자민당과 재계 인맥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원래 북한의 자민당 인맥은 ‘AA연구회’ 멤버가 주축이었다. 그 중심인물은 우쓰노미야 도쿠마 참의원의원. 지난 2월 남북고위급회담의 오찬에서 김주석이 지적한 “사시미를 한 접시 내놓으면 더 달라고 조른 사람”이 바로 그다.

  그 AA연구회 출신인 이시이 하지메 의원이 현재 ‘일·조우호촉진의원연맹’회장을 맡고 있고, 연맹초대회장 구노 주지 의원이 ‘일·조무역회’ 회장으로 있어 자민당내 AA그룹이 아직도 북한인맥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재작년 9월 3당공동선언 이후 자민당 내 북한인맥의 리더로 부상한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는 예상과는 달리 80회 생일 축하사절단에 참가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초대장이 왔지만 지금 입장으로는 갈 형편이 못된다. 핵사찰문제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삼가겠다”는 것이 그의 불참 이유였다.

 

가네마루 신을 신주 모시듯…

  그러나 그는 월간지 《세계》 4월호의 임시 중간호에서 “금년 1월 미야자와 총리로부터 자민당 부총재 취임을 요청받았을 때 일·조국교정상화 촉진을 수락조건으로 내걸었다”고 밝히고 “조선문제는 내 정치의 최대 목표이다”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는 재작년 9월 김주석과 단독 면담한 자리에서 “내 정치생명을 걸고 (일·북수교를) 해결하겠다”고 장담했던 바로 그 말과 똑같은 것으로 일·북수교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북한당국 역시 일·북수교의 최대 후원자 가네마루를 신주 모시듯 갖은 정성을 다하고 있다. 작년 5월 나고야-평양간에 첫 취항하는 직행 전세기 속에 가네마루의 둘째 아들 신고의 모습도 보였다. 그의 북한방문 목적은 김주석에게 가네마루의 친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북한당국은 가네마루의 일개 비서에 불과한 그를 칙사대접하듯 모시고, 귀국길에는 가네마루 앞으로 선물까지 보냈다. 그 선물이란게 사시미용 쏘가리였다. 그러나 특별히 제작한 수조에 넣어 조심스럽게 운반한 이 쏘가리는 가네마루에게 전해지기 전에 모두 죽어버려 무용지물이 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신고는 상당한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작년 여름 일·조우호촉진의원연맹의 일원으로 북한에 갔을 때는 통역을 배석없이 김주석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때 그의 방북목적은 3백여명의 방조단을 일일이 김주석과 악수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악수작전으로 일·조우호촉진의원연맹을 지방에까지 확산시킨다는 생각에서였다.

  가네마루에 대한 북한당국의 팩시밀리 통신서비스도 똑같은 ‘아부작전’이다. 가네마루는 《세계》와의 대담에서 “지난 1월말 워싱턴에서 열린 북·미 차관급회담에 참석했던 김용순 서기가 회담 진전 내용을 수시로 보내왔다”고 밝혔다. 또한 대일수교의 최고 책임자인 김용순 서기가 평양에서 수시로 가네마루·다나베 두 사람에게 팩시밀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도쿄에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최근 들어 가네마루와 다나베 콤비의 한계를 느끼고 또다른 인맥찾기에 여념이 없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배상과 경제협력 규모를 유리하게 타결짓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들 이외에 돈줄을 쥐고 있는 대장성 인맥도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이다. 이 문제에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 타깃은 현재 일·한의원연맹 회장인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 오랫동안 대장상으로 재임해 대장성에 인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장상 출신 다케시타 전 총리에 접근

  그러나 지금 북한의 대일공작이 모두 척척 들어맞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한 예는 작년 11월 결성을 목표로 추진했던 ‘일·조우호친선협회’가 아직도 설립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과 중국이 국교정상화 이전 민간인이 주축이 된 ‘일·중우호협회’를 설립, 수교교섭을 측면 지원했던 선례에 따라 가네마루와 다나베는 작년 9월 3당공동선언 1주년을 맞이해 똑같은 협회를 만들어 일·북수교를 지원하기로 합의했었다. 그러나 외무성의 반대와 재계의 소극적인 태도로 목표였던 지난해 11월을 넘기고도 지지부진한 상태이다.

  북한은 이 협회가 일본서 설립되는 것을 전제로 작년 기존의 ‘조·일우호촉진친선협회’를 중국과 똑같은 명칭인‘조·일우호친선협회’로 개칭하고 최고고문에 김용순 서기, 회장에 김양건 국제부 부부장을 앉혔다. 그러나 일본에서 설립이 늦어지자 이에 대해 큰 불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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