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씨를 총리로”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3.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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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바란다’ 묘안 백출 ․ ․ ․ 중1생 개혁 훈수까지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통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전자 우편으로 가입자가 특정 수신자에게 띄우는 사적인 편지이다. 이 난을 이용하는 다른 가입자들은 자기 편지 외에는 다른 내용을 볼 수 없다. 수신처인 청와대에서만 그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까지 ‘대통령에게 바란다’ 난을 통해 대통령에게 보내온 편지는 모두 4백여 건에 이른다. 개중에는 중학생임을 밝힌 중1생과 광대가 아닌 이상 신명도 장단도 없이 무턱대고 춤출 수는 없다고 하소연하는 중소기업체 사장도 있다. ‘열심히 하십시오. 파이팅’이라는 단 두 줄의 짧은 글에서부터 공들인 도표를 곁들인 수십 쪽에 이르는 논문까지 형태도 다양하다.

 무삭제 원본을 바탕으로 컴퓨터 통신에 투영된 정치 의식의 일단을 살펴본다.

“반대 위한 반대에는 신경쓰지 마세요”
 여러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던 현정부의 개혁을 지지하는 경항은 컴퓨터 편지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특히 “저는 사실 선거 때 김영삼씨를 찍은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3당합당 때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에. ․ ․ ․ 그러나 지금은 정말로 호피를 얻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 그것을 쟁취한 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정부에 대한 강한 신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라는 등 대통령선거 때 지지계층이 아니었다고 밝히면서 ‘예상 밖의’ 개혁에 호감을 느꼈다고 말하는 사례가 많다.

 “아직도 옛 시대의 유물처럼 흉측한 인상으로 국민 앞에 염치없게도 자신은 떳떳한 듯 나서는 무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 ․ 저희 세대는 개혁 정책을 통해 힘을 얻고 뭔가 열심히 하면 노력한 것만큼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사회일각에서 벌어졌던 각종 비리에 경악을 감추지 못합니다. 일부 여야의 반대를 위한 반대에 신경쓰지 마시고 과감히 하십시오.”

“대통령 정치자금은 공개하면 안됩니까?”
 “얼마 전 한 신문을 읽고 노파심에서 이 글을 씁니다. 이제 ‘사정은 그만하고 개혁으로 나가라’는 글이 있는데 저는 여기에 절대 반대입니다. 아직 수구 세력이 대부분 건재하고있기 때문에 법 개정을 통한 개혁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정과 개혁은 임기 만료까지 계속돼야 한다고 봅니다.”

 이처럼 중단없는 개혁과 사정을 주문하는 의견들이 많다. 그 중에는 중학생의 제법 의젓한 훈수도 끼여든다. “대통령 할아버지. 딴게 아니라 요사이 신문을 보면 무척 신이 납니다. 근데요, 음식도 빨리 먹으면 체한다고하지 않습니까. 개혁 속에서도 꾸준한 발전이 있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요. 하여튼 대통령께선 정권이 끝나신 후에 뒷말(청문회, 백담사, 뇌물)이 나지 않는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정부가 주도하는 개혁과 사정의형평성 및 정치 의도에 회의를 나타내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특히 박태준 의원 처리와 관련한 의견이 많은 것도 이채롭다.

 “공직자가 아닌 개인 사업체의 회장 자격으로 받은 금전이 뇌물이라는 개념으로 처벌이 가능한지 알고 싶습니다. 현재 박태준 회장에 대한 수사는 정치적 이유가 더 크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새로운 정치 문화를 위해 오직 탈세 혐의만 조사하여 처벌하기를 기대합니다.”

 “박철언 ․ 장세동 씨 구속, 박태준 ․ 정주영씨 조사 등, 사실상 그 독립성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는 여태까지의 검찰의 태도를 보아 이는 정치보복이라고 보기에 충분합니다. 요즘의 개혁들은 어차피 이루어져야 할 성질의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란 분이 복수심에 불타서 자기의 적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아 넣는다면 정말 그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수란 윤리적으로 별로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03시계는 대체 어찌된 것입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정치적 보복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아직도 선결 과제인 금융 실명제나 대선거구제, 그것보다 우선하는 역사의 재정립,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아무런 대안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커다란 뿌리를 골라내는 일을 뒷전으로 하고 사건 터뜨리기 식의 가지치기는 지금이야 모양새 좋고 번듯하게 보기 좋다는 칭친을 많이 듣겠지요. 그러나 임기 내내 가지치기만을 할 수는 없지요. 뿌리만 잘 가꾼다면 윤기있는 새 잎들이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박태준씨에 대한 법처리 문제가 신문에 나옵니다. 아마 정치자금 부분이 크게 문제가 된 것 같네요. 정치적 보복이라는 이야기도 많고요. 지금 대통령은 돈이 어디서 나서 썼는지 공개하면 안됩니까? 하늘에서 떨어졌을 리는 없고 누군가 줬을 텐데 거제도 어장 것 말고 다른 데서 받은 것이 모두 건전한 돈이라면 떳떳이 공개하고, 다른 사람 것 따집시다.”

 “지금 시행중인 사정은 너무 편파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화은행장 비자금 조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가장 핵심 인물인 전 재무장관 ○○○과 이원조 의원을 해외로 도피하도록 놔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소위 피라미만 잡아넣은 이유가 뭡니까. 이른바 한국병은 서민들보다는 고위층에게 있지 서민들에게는 그런 병조차 걸릴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문민 정부에 어울리지 않는 상황을 꼬집는 이야기들도 있다.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선거를 할 당시 금품이나 선물을 절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왼쪽 팔목에는 ‘김영삼’(한자로)이라고 쓰여진 시계를 차고 있습니다. 그 뒷면에는 한자로 ‘대도무문’이라고 선명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저희 아버지께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받은 사람도 잘못이 있지만 ․ ․ ․ 이것에 대해 반드시 해명을 부탁드립니다. 그것이 안되면 이것에 대해 영원히 오해하며 살 것입니다.”

 “요즘 대학가에서 다시 소요가 일고 있어서인지 거리에서 불심검문을 하고 있는 경찰들을 봅니다. 물론 민생을 위해서인지는 모르나 그런 모습은 또다시 그 전 정부의 행태를 보는 것 같아서 조금은 아쉽습니다.”

 “안녕하세요. 끝내주는 남자 김호중입니다. 정말 많고 많은 단어들을 듣고 봐왔지만 ‘문민정부와 최루탄’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처음 대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많은 분들처럼 이제는 이 땅에서 최루탄 냄새가 사라지겠지 하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 ․ ․”
 경제 문제 역시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임을 반영하듯 컴퓨터 편지의 주요 소재이다. 중소기업 경영인들의 편지는 애절하기까지 하다.

 “은행에 저축해 봐야 돌아오는 혜택은 없고 막상 돈 좀 빌려 쓰려면 은행은 지나치게 고자세이니 은행과 중소기업 혹은 일반기업과의 관계는 불평등 그 자체입니다. 이번 김영삼 대통령의 일련의 정책 추진을 보면서 일말의 기대를 가져봅니다. 그러나 지잔번 노태우 대통령 초기에도 저는 똑같은 기대를 가졌었는데 결과적으로 속아도 너무 속았다는 생각만 5년 동안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이겠지요.”

 “불황이 계속되고 잇습니다. 신명도 장단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광대가 아닌 이상 무턱대고 춤추지 않습니다. 춤춰라, 신바람 내라 하면 그게 억지 타령 아니겠습니까. 나라에서 한 중소기업의 생사를 돌봐줄 수는 없는 일이지요. 물론 정부에서 일일이 도움을 주어서도 안됩니다. 경쟁력이 약화되니까요. 단지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도록 붙잡지나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중학생의 ‘금융실명제 불가론’ 눈길
 컴퓨터 통신 가입자 대부분이 20~30대층인 만큼 경제에 대한 구조적인 개혁, 이를테면 금융실명제의 전면 실시를 비롯해 부의 형평성을 꾀할 수 있는 과감한 조처를 요구하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중학생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 한 가입자는 ‘금융실명제를 해서는 안된다’는 나름대로의 소신과 논리를 내놓아 눈길을 끈다.

 “저는 중학생이고 저희 아버지께서는 1백만원 남짓 고생하셔서 번 돈으로 살림을 꾸립니다. 저를 재벌 아들로 오해하실까 봐 경제력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미국은 성공했지만 경제대국인 일본도 금융실명제에 실패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외화가 부족합니다. 그런데 금융실명제로 외화가 빠져나간다면 우리 경제에 좋을 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김대통령은 소음인이므로 과로는 금물”
 “고통분담의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 명확히 하지 않으면 효과를 발휘할 수 없으며 오히려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될 뿐입니다. 가능한 방법으로는 운동 경기에 규칙이 있듯이 기업 활동과 노동운동에도 명확한 원칙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 원칙은 기업의 지불 능력에 맞추어 기업주는 임금 인상을 해주어야 하며, 지불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는 조합이 부당하게 요구할 수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통신 가입자 중에는 정부의 행정관리, 한글학자, 중고교 교사, 교통문제 연구자 등 각 분야 전문가들도 더러 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십분 살려 관련 분야에서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의 불충분한 행정정보 공개, 남녀고용평등법 아래서도 여전한 남녀 차멸, 동성동본 금혼법, 형식에 그치는 공해 단속 업부, 서울 안에서의 출근길이 무려 2시간 40분이 걸리는 교통체증 현상, 지역 편차, 형식적인 예비군 훈련, 껍데기뿐인 장애인 정책, 사기 떨어진 직업군인 사회 등 부조리한 현실을 ‘경험을 실어’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진지한 의견들이 대부분이다. 중고교생 편지는 한결같이 머리를 자유롭게 기르도록 해주고 학교 폭력을 없애 달라는 ‘간절한 절규’를 담고 있는가 하면, 한의사들이나 한의학도들의 의약 분업을 둘러싼 집단 민원성 호소도 많다.

 한의학 관련 정책을 바로 수립해 달라고 호소해온 한 한의사는 “제 소견으로는 김대통령계서는 사상인 중 소음인에 해당된다고 사료되오며 소음인에게 이로운 음식은 따뜻한 성질의 음식이오니 칼국수나 설렁탕을 드시더라도 딸기 ․ 참외 ․ 오이 ․ 냉채 ․ 냉면 ․ 밀가루음식 ․ 돼지고기 ․ 아이스크림 ․ 감미료 인스턴트 등은 드시지 마시고 지나친 생각이나 과로는 금물이오니 항상 건강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라며 친절한 처방전을 내놓기도 했다.

 개중에는 전문성이나 타당성과는 다소 거리가 멀지만 웃음을 자아내는 엉뚱하고 기발한 제안들이 끼여든다.

 “국무총리에 김대중씨를 한번 앉혀 보는게 어떨까요. 그래서 5 ․ 18 광주사태랑 12 ․ 12 사태 등을 처리케 하고 국정을 위해서도 그를 한번 기용해 본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찬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중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입니다. 제가 할 말은 우리 주변에 조직들이 많아서 겁이 난다는 겁니다. 요놈들 빠른 시일 내에 싹! ! 쓸어 주세요.”

“폭력교사 쫓아내고 해직교사 앉히세요”
 “텔레비전에서 말하는 오렌지족이라는 부류를 대통령께서도 들으셨나요? 그런 사람들이 정말 우리를 살기 싫게 만든답니다. 아무 일 안하고 쓰기만 해도 돈이 남아도는 사람들에게 대통령께서 중장하시는 고통의 분담을 느끼게 해주세요. 그리고 이런 발표도 해주세요. 오렌지족은 ‘쓰레기족’이라고요.”

 “전과자가 출범하여 10년 동안 모범적으로 살았다면 빨간 색을 파란 줄로, 파란 줄을 받은 지 10년 정도 모범적으로 살았다면 다시 녹색 줄로, 녹색 줄을 받은 지 10년 동안을 다시 착실히 살았다면 이 녹색 줄을 소멸시키는 겁니다. 여기에는 범행의 강도에 따라 차등을 두심도 상당히 좋을 것입니다.”

 “태극기를 바꿔야 합니다. 각 괘의 색깔을 검은 색에서 파란 색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검은 색은 죽음의 색깔입니다. 중앙청 시청을 없애고 명산에 꽂혀 있는 혈봉을 빼고 우리나라의 민족 정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북상 분교 어린이 일동입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청와대에 가보고 싶어요. 여긴 너무 멀어서 갈 수 없습니다.”

 “오늘 소위 선생님한테 구타당하고 온 고3올시다. 구타는 매와 다른 거 대통령께서도 알지요? 내가 정부에 바라는 것은 폭력 교사를 단호히 처단, 해직시키고 그 자리를 지금 생계를 겨우 유지해 가는 해직 교사로 채웠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학교에서는 작년까지 입지 않았던 교복을 입히고 두발 단속을 한다고 합니다. 근데 머리 빡빡 깎으면 공부를 더 잘하나요? 그리고 왜 일제 교육의 잔재를 뿌리 뽑자고 외치는 선생님들이 일본에서 시작된 교복을 입히나요? 대통령님도 옛날에 고등학교 다닐 때 머리 빡빡 깎았겠죠? 그럼 그 기분을 아실 겁니다. 모르시면 어쩔 수 없는 세대 차이겠죠.”

 광주 문제의 미해결을 질타하고 개혁의 형평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따갑고 쓰리고 아린’ 의견에서부터 깨소금 양념 같은 의견을 담은 다양한 컴퓨터 편지들이 청와대에 날아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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