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서도 중국서도 조선족은 우수했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2.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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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비 "한인을 배워라'…이광규 교수 '해외교포' 분석

 우리가 겪어야 할 과정을 로스앤젤레스 교포들이 대신 겪고 있는 것입니다. " 혹인폭동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서고 교포들의 자구노력이 한창 진행되던 지난 5월14일. 서울대 이광규교수(인류학)는 새 저서의 두툼한 원고뭉치를 꺼내면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 민족은 너무 오랫동안 단일 민족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아본 경험이 부족합니다. 국제화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이러한 경험을 그곳 교포들이 비싼 대가를 치르며 대신 배우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로스앤젤레스사태를 우리와는 상관없는 문제, 또는 교포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정도로 짚고 넘어가려는 분위기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해외 교포에 대한 입장을 바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저서 출간을 서두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난 15년 동안 이교수는 틈나는 대로 해외 교포 사회를 현지 조사해 왔다. 그동안 내놓은 저서도 83년《재일교포》, 89년 《재미한국인》 그리고 지난해 집필이 끝난 '소련교포연구' 등 여러 권이다. 이 저서들이 교포 사회에 대한 각론적 접근 위주였다면 이번 책은 총론적인 접근, 주로 시각의 문제를 다루고있다. 그래서 '국제화시대의 한민족의 진로'라고 가 제목을 달아놓았다.

 "우리는 지금 치열한 생존경쟁 시대에 살고 있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해외에 5백만이나 존재하는 우리교포들은 소중한 자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좁은 틀에 사로잡혀 있는 한 해외 교포들은각각 '중국 국민' '소련 국민' 등 우리와 별개의 국민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식이다. 이는 국내에 있든 해외에 있든 우리 민족은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이다. 국민의식에서 민족의식으로 대전환이 필요하다. 민족의식 정립을 통해서만이 해외 교포와 우리를 연결하는 끈이 탄탄해지고, 북한 동포들도 한민족으로 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 게 된다. "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이 설 때 해외 교포는 우리의 시야를 한반도에서 세계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고리이다. 여태까지 해외 교포는 우리 상품의 외판원이요, 문화의 홍보관 이요, 민간 외교관 구실을 해왔다. 앞으로 국제화시대에 이들은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 간의 접점을 이루는 첨병이다. 이들을 통해 다른 문화를 배우고 우리 것을 전파함으로써 인류 번영에 이바지할 수 있다.

 

"민족의식 연대해야 인류에 공헌"

 이러한 생각은 그가 교포 사회를 폭넓게 연구하며 자연스럽게 형성해온 것이며 이 책의 중심 사상이다. 그는 해외 교포들이 어떻게 다른 민족들의 틈바구니에서 한민족의 끈끈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살아왔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한민족의 근면성과 우수성을 발췌하며 주변의 다른 민족에 대해 지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교포들의 이야기는 그의 거창한 '한민족의 진로'론 의 근거가 된다.

 이 교수가 그 대표적 예로 꼽고 있는 것이 옛 소련의 중앙아시아에 있는 포리토젤 콜호즈이다. 포리토젤 콜호즈는 우즈벡공화국의 수도 타시켄트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한인들의 집단농장이다. 이 마을은 옛 소련의 3만여 콜호즈중 국영 관광공사인 '인투리스트'의 외국인 관광 코스에 유일하게 올라있는 콜호즈로 유명하다. 한인들이 세운 이 마을이 전 세계에 소련을 대표하는 농촌 마을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처음 개발한 사람들은 1920년대에 연해주 지역에서 건너간 한인 20여명이었다고 한다. 1차대전에 참전했던 이들은 이 지역이 물만 끌어댈 수 있다면 농사 짓기에 적합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러나 본격개발이 이루어진 것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조치로 연해주에서 한인 교포들이 대거 이주하면서부터 이다. 대부분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연해주로 건너갔던 한인 교포들은 그곳 러시아인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며 기반을 잡았었다.

 한인들이 새로 이주한 중앙아시아는 황량한 벌판에 잡초만 우거진 준 사막으로 유목민이 살기에나 맞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한인들은 '스탈린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을 이루어냈다. 가까운 강에서 물줄기를 끌어대고 가져온 볍씨를 뿌려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3년 만에 한인들은 다시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한인들은 연해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에서도 최초로 농사짓는 법을 전파한 민족이 된 것이다.

 포리토젤 콜호즈는 중앙아시아 한인사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이다. 이는 또 옛 소련 지도부에도 농촌의 개혁방향을 제시하는 모델로 여겨졌었다. 고르바초프가 "한인들로부터 배우라"고 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중앙아시아의 한인이 역경을 딛고 다른 민족에게 우리의 문화를 전파하면서 일어서는 과정은 일제시대 만주로 건너간 조선족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현재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 민족 중 漢族보다 수입이 높은 유일한 민족이라고 한다. 만주지역으로 건너간 초기의 조선족이 적응하는 과정도 농사를 통해서였다. 원래 만주 땅은 척박해서 밭농사가 주류를 이뤘었다. 그러나 조선족은 한족들이 밭농사에 조차 적당치 않아 버려둔 땅들을 개간해 논농사를 지었다.

 조선족이 주로 사는 중국의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 등 동북 3성은 자원이 풍부한 중국의 요충이다. 이런 연유로 이곳은 중일전쟁 과 국공 내전의 중요한 전장이었다. 현재의 중국정권이 형성되던 시기에 조선족은 어느 민족보다 크게 활약했다.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는 이처럼 조선족이 흘린 피의 대가로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인구 비례로 보면 해외 교포 제일 많아

 이밖에 재미교포나 제일교포, 유럽 및 중남미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 퍼진 우리 교포들은, 이번 로스앤젤레스 사태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토착민과의 갈등 등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면성과 우수성을 발췌하여 대부분 모범 민족으로 자리잡아 왔다. 해외에 멀리 퍼져 있는 이러한 양질의 자원을 우리의 민족 역량으로 결집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교수의 생각이다.

 인구비례로 따져볼 때 유태인을 제외하면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외 교포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중국의 화교가 우리보다 많지만 10억 인구에 비하면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고 일본인도 인구에 비례하면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더구나 우리 교포들은 몇몇 주요국 뿐 아니라 전 세계 1백2개국에 골고루 퍼져 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의 근세사가 고난의 역사였다는 것을 상징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교수에게 이 고난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띠고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인류 역사의 소명을 맡기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래 동안 단일 민족으로 살아왔고 농경생활을 해와 토지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강한 우리 민족이 일제라는 외압에 의해 마치 "괸물의 물방울이 사방에 튕기듯" 세계 곳곳에 퍼지게 된 것부터가 앞으로 다가올 국제화시대를 위한 준비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험은 당시 인류의 5분의 4를 이루었던 피압박 유색인종을 동지로 삼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6.25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선 우리 민족의 저력은 이들 유색인종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국제화시대에 우리는 "갈림길에 서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류 공동의 이익에 이바지할 수 있을지,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지의 갈림길이다. 해외 교포들과 민족의식으로 연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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