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당도 “좌파는 싫다”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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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당, 당내 별도조직 결성한 6명 제명…“비현실적 논리에 휘말릴 수만은 없다”

민중당 당원들의 상호 호칭은 좀 유별난 데가 있다. 평당원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당 대표가 비서를 부를 대도 반드시 ‘동지’라는 호칭을 붙인다. 다른 당에서도 동지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행사용이거나 문서용일 따름이지 민중당처럼 일상화되어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민중당 지도부는 지난 15일 상임집행위를 열어 그 ‘동지들 가운데 6명을 제명했다. 이들 6명이 최근 당내 ’좌파블록‘인 ’민중당 개혁을 위한 당실무자회의‘(이하 실무회의)를 결성, 당내분을 주도하며 해당행위를 했다는 것이 제명 사유였다. 민중당은 이들과 주장을 같이해온 오세철 교수위원회위원장 등도 잇따라 중징계할 방침을 분명히 했다. 민중당의 한 핵심간부는 “민중당으로서는 한명의 동지도 아쉬운 상황”이라면서도 “대중정당으로서 존립해야 하는 당으로서는 현실적인 조건을 감안하지 않은 좌파 논리에 언제까지나 휘둘릴 수는 없다”고 그 배경을 털어놓고 있다.

그러나 당의 제명방침에 반발하고 있는 실무회의측은 “당기위원회를 통해 민중당의 오도된 개량화 방향과 지도부의 전횡을 낱낱이 폭로하겠다”고 벼르고 있어, 향후 진로를 둘러싼 민중당의 내분과 진통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해방 이후 최초의 진보적 대중정당을 자임해온 민중당내의 이념적 갈등은 무엇인가.

창당대회 때부터 갈등의 불씨 내연
민중당 내의 ‘좌파 블록’ 진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실상 당 강령의 채택과정에서부터 갈등은 시작됐다. ‘민중세력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기치를 함께 들긴 했지만, 노동자계급의 전위정당에 비중을 두는 입장과, 진보적 대중정당에 무게중심을 두는 입장이 대립한 것이다. 좌파적 입장의 소위 ‘전위정당론’ ‘민중당 활용론’은 주로 민통련 ·전민련 일부 인사와 노동 ·농민운동가 출신, 구 제헌의회(CA) 그룹에 의해 제기됐다. 이런 입장 차이는 자연히 당의 성격 규정, 민중의 개념 규정, 지향하는 체제(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등을 둘러싸고 끊임없는 의견충돌을 낳았다.

결국 절충과 타협 끝에 강령의 사상적 기조는 “민중 주체의 미주주의”라는 모호한 개념선에서 낙착됐지만 갈등의 불씨를 덮어놓은 데 불과했다. 창당대회 당일 일부 지구당 위원장과 학생당원 일부가 당헌 ·강령 ·지도체제 등에 무제를 제기하며 창당대회장 한켠에서 즉각적인 전당대회 소집을 요구하며 물리력을 행사하는 소위 ‘창당대회 방해사건’이 벌어져 민중당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한 바 있다.

‘덮어둔’ 갈등이 다시 재연된 것은 5월 정국 당시 당 지도부의 ‘어정쩡한’ 투쟁에 불만을 가졌던 좌파블록은 ‘기만적이 6월 선거의 보이콧’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개량화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선거에는 참여하지 말아야 다른 보수야당과 차별성을 보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민중당 지도부는 5월26일 논란 끝에 “선거 준비를 해온 지구당은 참여하자”는 ‘제한적 참여’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선거 불참론을 주장해온 20대 실무자 40여명이 중앙당의 선거참여 결정에 반발하고 당내 별도조직을 결성, 중앙당과 대결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5월30일 ‘실무회의’를 결성한 이들은 “민중당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등의 문건을 선거 준비중인 지구당에 내려보냈고, 중앙당은 이를 ‘중대한 도전행위’로 간주했다.

“민중당은…”이라는 문건은 이우재 ·김낙중 대표를 비롯 장기표 정책위의장, 이재오 사무총장 등 당 지도부를 ‘우파, 개량주의, 배신자’로 규정하는 매우 공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문건은 6공화국 정권이 민중당을 탄압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덜 전투적인 하나의 운동단체에 머물고 있고” “후진적인 사상이 주도하는 순화된 운동”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 이 문건은 “민중당이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민중정당이 아니라 합법적 대중정당론과 어설픈 개혁사회주의론으로 계량화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실무회의측은 또다른 문건을 통해 “민중의 독자정당 건설이 당 대의임에도 불구하고 야권통합의 기도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민중당의 간판을 가지고 부르주아 정치꾼 정당으로 넘어가는 것만은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렇듯 중앙당의 ‘개량화’에 대해 공격의 포문을 연 실무회의는 “노동자 계급정당의 입장과 전망을 확고히 하는 길이야말로 민중당의 유일한 대안이다. 민중당의 개혁을, 진정한 민중정당의 건설을 염원하는 모든 동지들은 뭉쳐야 한다”며 당내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조속한 시일 내에 (가칭) ‘민중당 열성자 대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광역선거에서 ‘당의 급진적 ·폭력적 이미지’때문에 고전했다고 판단하는 당 지도부는 이러한 ‘좌파블록’의 움직임을 “비현실적이고 교조적인 좌편향적 사고”일뿐이라고 일축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의 ‘당내 도전행위’를 창당 이래 당의 발목을 붙잡아온 좌파논리를 청산할 수 있는 계기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실무회의측이 징계 직전 당의 조직해체 결정에 승복하겠다고 밝혔는데도, 중앙당이 굳이 제명처분이라는 극한처방을 내린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총선까지 버티고 살아남는 게 문제
반발의 여지는 있지만 어쨌든 좌파블록을 청산한 민중당은 어디로 갈 것인가. 물론 그 전체적인 방향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지향하는 쪽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민중당의 ‘현재 틀’로는 총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민중당은 광역선거 이후 진보세력의 총집결을 주창하고 있다. 민중당 지도부는 △민중운동 지도급 간부와 신민  ·민주당의 진보적 정치인과의 신당 △재야 ·민중민주운동세력과의 대통합 △권력교체기까지 신민 ·민주 ·재야와 일정수준의 연합 △여의치 않을 경우 전농 ·전노협 ·전교조 등 운동단체 및 시민연대회의 등과의 결합을 통한 세 확장 등의 여러 방법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진보세력 판짜기’가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지구당 수의 확대, 비례대표에서의 정당투표제 도입, 기존 야당과의 연합공천 등으로 돌파구를 연다는 방침이다.

지난해 11월11일 주홍색 깃발을 내걸며 ‘한국 정치사의 진보정치 실험’을 예고했던 민중당. 이경재 조직국장은 그 현주소를 이렇게 말했다.

“장기적으로 낙관한다. 그러나 당장은 총선까지 버티고 살아남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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