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식 ‘남방외교’개방 5단계
  • 한종호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1.08.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깜짝쇼’ 아닌 예정된 절차 파상적 양날개 대화작전 병행

최근 몇달 사이에 일어난 북한의 대외정책 변화는 많은 사람들을 무척 당혹하게 했다. 그러나 이는 한두차례의 ‘깜짝쇼’로 끝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북한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금년 초에 유엔가입 및 핵안전협정 서명 방침을 정해놓았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북한은 이미 일련의 ‘개방일정’을 잦고 있으며 적절한 시기선택이 문제일 뿐이라고도 한다. 정부 당국자 및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그 ‘개방일정’은 △유엔가입선언 △일본과 수교 △미국과의 관계개선 △남북한 관계 정상화 △국제사회에서의 지위향상 등 5단계로 요약된다.

그 첫단계로 북한은 지난 5월27일 유엔가입의사를 표명,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갑작스런 발표는 경색된 남북한 관계를 급진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됐다.

한편 지난 12일부터 워싱턴 근교 매리오트호텔에서 열린 제7회 미주지역학술회의에서 클레어몬트 매키나대학의 李?畛 교수는 “이제 북한이 취할 수 있는 정책은 미국과 일본에 대한 ‘남방외교’이다”라고 말했다. 북한이 경제재건과 남방외교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온 기존의 유엔정책은 일단 수정된 것으로 볼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의 한 관계자는 “북한의 결정이 중 ·소의 압력 아래 미·일과의 관계개선을 목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대남정책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다음 단계로 북한은 유엔가입선언을 발판으로 미 ·일과의 협상을 본격화했다. 내년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앞두고 일본과의 수교를 서둘러 온 북한은, 일본이 △핵사찰수용 △남북 고위급회담 재개 △남북한 유엔가입 △이은혜 신원조회를 조건으로 내걸자 지난 5월 수교회담을 결렬시켰다. 이후 양측은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전을 계속해왔다. 한편 지난 13일 <산케이신문>은 북한이 일련의 평화공세를 배경으로 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수교회담을 9월 이후로 잡자고 할 공산이 크다고 보도했다.

새로운 형태 남북관계 제안 가능성도
일본과의 수교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미국을 방문한 祖平統부위원장 韓時海는 6월1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비공개 세미나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 ·미국간의 대화가 실현되어야 한다”며 관계확대를 요구했다. 6월24일 미군유해송환 때에도 북한은 협상의 정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6월19일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부대변인은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만큼의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북한의 정책변화가 뚜렷해지면서 남한은 본격적인 통일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파상적인 양날개 대화전력으로 맞서고 있다. 지난 11일 북한은 8월27일부터 평양에서 4차 고위급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개방일정의 네번째 단계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다른 한편 지난 9일에는 범민족대회 제2차 실무회의에 祖平統 부위원장 全今哲을 단장으로 한 5명의 대표단을 파견하겠다고 했다. 14일에는 朴成哲 부주석 담화를 통해 민족통일 정치협상회의를 거듭 제의했다. 이같은 일련의 대화전력은 고위급 회담을 통해 미 ·일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면서 남북대화의 주도권을 잡아나가고 다른 한편 범민족대회 등을 통해 해외 및 남한에 통일전선을 구축해나간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미국 및 일본과의 수교, 혹은 그에 준하는 관계개선을 마무리 지은 시점에서 북한이 새로운 위치에서 새로운 형태의 남북한 관계를 제안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만 그 전제가 되는 것은 북한이 미 ·일과의 관계개선을 앞당기고 어느 정도 남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을 때라는 점이다. 그때라면 북한이 남한에 대해 군축이나 교류분야에서 획기적인 양보를 하면서 평화적 공존체제 확립을 위한 협정의 조인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과를 기초로 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북한의 ‘5단계 개방일정’은 바로 이같은 몇가지 가설과 전제들이 충족될 경우에만 실현될 수 있는 대단히 불완전한 것이라 하겠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