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한인을 돕자"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4.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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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신한인촌 건설 총책임자 김 블라디미르씨



 연해주 빨치산스크 시는 한민족 수난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水淸'이었다. 1870년대 최초 이주민인 한인들이 산 좋고 물 맑은 한반도 북부의 고향 땅을 연상시킨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원래 황무지나 다름 없던 이곳을 한인들이 피땀 흘려 문전옥답으로 바꾸자 제정 러시아가 이곳을 자기네 행정권에 편입시키면서 이름을 수청의 러시아 표기인 '슈찬'으로 바꾸었다. 그 뒤 1937년 한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옛소련 당국은 아예 한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빨치산스크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다.

인플레로 휴지 된 이주 지금
 그 빨치산스크의 한 귀퉁이, 25ha정도의 조그만 땅에 슈찬이라는 옛 지명이 부활한 것은 지난 91년. 이보다 2년 전인 89년 전소고려인협회가 이곳에 신한인촌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이래, 총책임자로 지명된 김 블라디미르 세르 게이비츠씨(67)가 3년여 러시아 당국을 설득한 결과였다. 공식 명칭은 미크로 라이언 슈챤, 우리말로 번역하면 슈찬 소구역. 이는 곧 '한인 소구역'이 되는 셈이다. 이 한인 소구역은 약 50만 중앙 아시아 한인의 희망의 땅이다.
 그러나 김 블라디미르씨의 한인촌 건설 계획은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전소고려인협회에서 연해주 이주를 결정한 이래, 김블라디미르씨는 부지 확보 및 한인촌 설계도 만들기를 서두르는 한편, 이주 자금으로 약 2백50세대로부터 1만루블씩 받아 은행에 예치해 두었었다. 그러나 90년 4월 옛 소련 사회가 격심한 인플레를 겪으면서 은행에 예치해 두었던 이주 자금이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본의 아니게 난처한 입장에 빠진 김 블라디미르씨는 이주 자금 확보를 위해 지난 92년에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만나 청원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의 딱한 사정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92년초 자영업을 하던 정준영씨 등이 '재소 한인 자치주 건립 범국민협의회'모임을 만들어 활발한 홍보를 하면서부터이다. 이 모임은 93년 11월 6일 기존의 조직을 확대 개편해 '재러시아 한인 돕기 모임(회장 서울대 이광규 교수)'이란는 이름으로 재출범했다. 현재 회원은 서울대 전경수 교수, 국회 입법자료 분석실 이종훈 박사(총무), 작가 정동주씨 등 학계.문화계.언론계 인사와 일반 시민 등 1백여명 정도이다. 재러시아 한인 돕기 모임은 첫 번째 사업을 김 블라디미르씨의 한인촌 건설 사업 지원에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우선 김 블라디미르씨를 1월 12일게 초청해 약 3주간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을 순회하면서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국민에게 직접 알릴 작정이다. 이밖에도 중앙 아시아 한인 가운데 연해주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아 국내 기업에 연수 형식으로 1~2년 정도 취업시켜 이주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한 사업도 모색중이다.

 한인촌 건설 사업에 뛰어들기 전까지 김 블라디미르씨는 옛 소련내 한인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자신 연해주에서 출생해 열두살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했지만, 그 뒤 손바닥에 못이 박이고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한 덕분에 옛 소련에서 최고의 영예라고 하던 '사회주의 노력영웅상'을 두차례나 받았고, 이 사업에 뛰어들기 바로 직전에는 우즈베크 공화국 페르가나 주 부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중앙아시아에 민족 분규가 불어닥치면서 한인들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지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인촌 건설 사업에 고집스레 매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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