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 깬 性愛로 더 멀어지는 자유
  • 김당 편집위원 ()
  • 승인 1992.08.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초적 본능>등 ‘에로’ 한계 넘은 포르노 음란 · 엽기는 표현 자유 아닌 ‘문명의 폭력’


 

《素女經》 속에 등장하는 성애의 체위들은 인간이 시간과 우주에 저 자신의 생명을 비비고 포개는 자유의 그래픽으로 읽힌다. 그 체위들이 빚어내는 조형은 흔히 기하학적 구도를 갖기도 하지만, 그 구도는 대칭이나 균형의 견고함으로 그 구도를 이루는 인간의 육신을 압박하지는 않는다. 그 체위들은 몸으로 이루는 만다라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흔한 여권주의자들은 《素女經》의 문장에서 드러나는 남성우월주의를 지적하면서 펄펄 뛸수도 있을 테지만, 만다라의 구도 속에서 그 체위를 관찰할 때 남성의 능동성과 여성의 수동성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수동은 수동으로서의 넉넉하고 조화로운 자유의 몫을 누린다. 만다라 속에서 능동과 수동은 소멸한다.

 

《소녀경》 · 《요가》는 정신에서 실현한 ‘육체’

 엘리아데는 《요가》에서, 육신에 바탕을 두고, 육신을 떠나지만 여전히 육신에 대하여 유효한 성교의 내용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요가의 큰 스승들 사이에서 봉행되는 이런 성교는 남자가 사정하고 여자가 수정하는 일방 통행식 사출 통로를 해체시켜버린다. 정(精)의 교류는 남녀 사이에서 쌍방적이고도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

 요가 스승들의 성교가 몸의 질퍽거림과 몸의 무게를 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것들 속에 함몰되지 않는다. 요가의 스승들은 정신과 육체의 이원적 대립을 부순다. 그들이 성교를 통해서 이루어내는 자유의 비밀은 가장 육체적인 것 속에서 실현해내고, 가장 육체적인 것을 가장 정신적인 것 속에서 실현해내는 데 있다. 그 대립이 무너져서 합쳐질 때 그들의 성교는 유체의 조건들을 배반하지 않으면서 육체를 넘어선다. 그 행위는 육체성과 공간성을 넘어서서 다만 시간 속에서 흐느적거리면서, 음악의 본질에 접근한다.

 여름철에 성애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영과에 폭발적으로 관객들이 몰리고 있다. 프랑스 영과 <연인>, 미국 영화 <원초적 본능>, 그리고 이제는 개봉관에서 떨어져나간 <경마장 가는 길>을 비롯한 몇 편의 국산영화들이 지속적으로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성애는 근본적으로 삶, 즉 실천의 항목이며 관찰이나 엿보기 또는 말하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더운 날의 이 많은 관객들은 일단 불우한 인구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이 《素女經》이나 《요가》에서 보여주는 성행위의 자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이유는, 우선은 그 행위에 부단히도 개입하려는 문명의 폭력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혹은 그 행위가 본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죽음의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연인> 속의 어린 여자(제인 마치)는 자신의 성(性)이 문명의 밑바탕으로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인간은 성행위 위에 가정 자녀 종족 도덕 행복 문명을 건설할 수도 있고, 혹은 매춘 타락 억압 허위 그리고 욕정의 습관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연인> 속의 어린 여자의 성적 무의식은 자신의 성 위에 그 어느 것도 세워지거나 개입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 어린 여자의 성의 근본은 아무런 전제나 대책 없이 무한정 열려있는 자유의 바탕이라는 점에서 《素女經》이나 《요가》의 성과 흡사하지만, 그 여자의 성의 사회적 관계는 사내(토니 릉)의 문명에 의해 침노 당한다는 점에서 《요가》의 성과 정반대다. 이 어린 여자가 자신의 성을 전제 없고 조건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때, 이 영화는 에로와 포르노의 한계를 부수어낸다.

 교접의 행위에까지 이르는 인문적 통과의장치가 없는 성행위는 포르노라는 구획을 이 영화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식민지 저자거리의 소음 속에서 벌이는 땀에 젖은 성행위, 남녀의 벗은 몸이 뒤엉켜 마루의 문턱을 넘어가는 격렬한 성행위, 혹은 사내가 바지의 지퍼만 내리고 치르는 다급한 성행위를 통해서 이 영화는 포르노의 영역을 보란 듯이 넘어선다.

 

내적 필연성 없이 행태의 거죽만

 이 영화는 이제 막 육체의 선과 굴곡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사춘기 여자의 몸속에 잠복해 있는 성 아나키즘을 돌연 ‘사랑’이라는 결말로 끝내버린다. ‘성’과 ‘사랑’을 영상적 증빙자료로 연결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린 여자의 성은 자유와 아나키즘을 향해 열려있지만, 열린 길 위에서 늘 훼손당한다. 그리고 다시 탐닉한다.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조건이 자유롭기를 갈망하는 인간이 이루어질 수 없는 자유 때문에 다시 훼손당하는 운명의 풍경을 ‘사랑’이라고 말해버리는 그 영화의 결말은 맥없고 어이없다는 느낌을 주기가 십상이다.

 <원초적 본능>은 격렬한 성행위의 절정과 잔혹한 살인을 연결시키는 장면을 상업적 전략의 포인트로 삼고 있는 듯하다. 이 살인은 성행위의 내면과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살인과 성행위라는 두건의 격렬함이 설득력 있는 내적 필연성이 없이 병치되었을 때, 화면이 이루어내는 것은 엽기성 뿐이다.

 여성 상위의 체위로 벌어지는 그 성행위에서 여자는 거의 실신에 이르는 격렬한 동작을 보여주고, 이에 송곳으로 남자를 찍는 장면이 나온다. 이 화면은 성행위를 순전히 육체만의 일로 받아들이게 한다. 살인과 성행위를 묶는 표현기법은 단지 그 ‘격렬함’뿐이다. 그리고 그 격렬한 육체 속에는 아무런 자유의 전제도 설정되어 있지 않고 실험되고 있지 않다.

 영화는 동성애와 이성애를 함께 즐기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금기를 우습게 여기고 있지만, 금기를 부숨으로써 얻어낸 결과는 그다지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성행위와 살인이 아무런 내적 필연성도 없이 병치되어 있듯이, 한 여자의 동성애와 이성애의 얽힘도 면밀히 탐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형태의 거죽만을 드러내 보였다.

 

性에 얽매인 인간의 자유

 성행위/살인, 동성애/이성애가 별 근거 없이 병치될 때, 그 성행위는 그것을 행위 하는 두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성행위가 거기에 열중하고 있는 인간을 그 행위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는 근본 이유는, 인간이 그것을 행위 하면서도 상대방의 육체적 정신적 체험의 내용을 자신의 체험 속에 접수할 수 없고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소외는 그 행위를 더욱 격렬하게, 실신에 이르도록 격렬하게 몰아낸다. <원초적 본능>이 보여주는 성행위는 바로 그런 질감의 성행위다. 그 행위는 이성과의 행위가 아니라, 익명성과의 성행위이다. 그런 관계 위에서 “더 세게, 더 깊이”밀어붙이는 격렬함이 포르노의 욕망이다. 그 욕망의 분출은 격렬할수록 절망적이고, 절망적일수록 격렬하다.

 <경마장 가는 길>은 이 권태롭고 무의미한 삶 속에서 지겨운, 그러나 격렬한 성행위의 내용을 보여준다. 남 주인공 R(문성근)와 여 주인공 J(강수연)가 화면 속에서 벌이는 말의 잔치는 세계의 무의미함과 그 무의미 위로 욕망만이 거대하게 치솟아 있는 풍경을 그려낸다. 세계는 지리멸렬한 허섭 쓰레기의 집적이며, 그 허섭 쓰레기를 아무리 쌓아올린들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 남녀 주인공은 확실히 예감하고 있다.

 전망 없는 세계 속에서 성행위는 격렬하고도 나른하다. 그들의 성행위는 그들의 '말‘과 닮아있다. 그것은 하염없는 행위들이다. 그 행위가 격렬하면서도 하염없이 표류하는 까닭은 이 무 전망한 세계의 무게가 그 행위를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름의 성애 영화들은 성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불우를 보여준다. 인간의 성은 《素女經》이나 《요가》의 자유로부터 너무나 먼 거리를 흘러왔다. 그 거리를 흘러오면서 성애의 표현은 수많은 금기와 장벽과 고정관념을 부수었다. 이제 금기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절편음란증도 근친상간도 더 이상 금기는 아니다. 그리고 깨어진 금기들의 파편 뒤에서도 자유는 건설되지 않는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