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과 성적 도둑
  • 박순철 (편집국장) ()
  • 승인 199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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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한 사회라면 구성원의 도덕적 수준도 높아야 한다. 우리 경제가 부닥친 벽도 가치관의 한계일지 모른다.”

영화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강력한 설교자이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쉰들러 리스트〉의 경우도 그렇다. 영화를 통해 실재 인물 쉰들러는 신화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므로 유태인 1천2백명의 목숨을 구한 그가 감사의 표시로 금니를 빼어 만든 금반지를 손가락에 끼고 종전의 혼란 속으로 사라진 다음을 묻는 것은 현명한 노릇은 아니다.

 하지만 딱하게도 그는 실재 인물이었으므로 그 신화의 긴 옷자락을 현실 세계로 끌고 나가야 했다. 얼마전 미국의 시사주간지 《유 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는 전쟁이 끝난 뒤 이 독일인 사업가가 걸은 길를 소개했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떠나 목장을 차렸으나 완전한 재앙으로 끝나버렸고, 독일로 돌아가 돈을 빌려 세운 시멘트공장도 얼마 못가 망했다. 결혼 생활도 파경으로 끝났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쉰들러의 반지’마저 팔아버렸다.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계를 구한다’는 탈무드의 글귀가 새겨진 금반지도 한잔 술의 위안처럼 절박하지는 않았다. 홀로코스트의 광기 속에서도 물질적 풍요는 그를 숭고한 인도주의자로 끌어올리는 받침대가 됐으나, 전후의 물질적 파산은 그를 정신적으로도 파산자의 길로 몰고 나갔다.

 50년대의 절망적인 가난에서 살아남은 한국인들로서는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영화가 있다.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이 48년에 만든 〈자전거 도둑〉이다. 지난 일요일 텔레비전에서 다시 방영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전후의 실업 사태와 빈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30대 가장보다는 이 가정의 생계가 달린 한 대의 낡은 자전거 같다. 자전거가 없으면 취직을 할 수 없는데 자전거를 도둑맞은 절망적 상황에서 그 자신도 결국 자전거 도둑의 길을 선택한다. 가난의 무거운 짐이 인간적 존엄성을 피폐케 한다.

학력 위주 사회에서 내신성적은 탐나는 재화
 풍요는 무엇을 가져오는가. 풍요는 선택의 폭을 넓힌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타락과 범죄의 길을 택해야 할 이유가 줄어든다. 그러나 범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도둑질도 여전하다. 다만 그 양태가 달라질 뿐이다. 쓸 만한 냉장고나 세탁기가 부담스런 쓰레기로 전락하는 사회에서 자전거 도둑은 옛 이야기로만 남는다. 도둑질은 훨씬 세련되고 고급스러워진다.

 지난주는 도둑 맞은 점수 이야기로 사회가 시끌벅적했다. 상무고에서 불거져나온 성적 조작은 그 파문이 계속 번져 나갔다. 학력과 학맥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사회에서 내신성적은 매우 탐나는 재화일 수밖에 없다. 1, 2점의 차이가 대학 입시와 그 연장선상에 갇힌 일생을 결정하는 마당에, 그 점수들은 주관적으로 몇백만 몇천만원의 가치를 지닐 수도 있다. 그 성적의 숫자들은 예금통장의 금액처럼 실질적인 가치를 저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둑질의 유혹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다이아몬드 같고 루비 같고 고액 수표 같은 이 고가의 성적들이 좀 과장해서 말하면 헌 신문지처럼 허술하게 다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학적부 관리 규정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학교장과 교사가 서로 견제할 때나 유효한 것이다. 학교장이 변조를 지시하고 교사가 이에 따르는 ‘협조의 현실’에서는 맥을 출 수 없다.

이미 잃어버린 교육다운 교육
 9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게리 베커 교수는 범죄의 공급함수를 구성하는 주요 요인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범죄를 저지르고 검거돼 유죄 판결을 받을 확률과 그에 따른 형량, 그리고 범죄 대신 선택 가능한 합법적인 일의 대가 등 사회 경제적 요인이 그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저질렀을 때 벌을 받을 확률이다. 도둑질을 하면 100% 붙잡혀 처벌 받을 것이 분명하다면 누가 도둑질을 하겠는가. 거꾸로 수지 맞는 범죄를 저질러도 100% 무사할 것이 분명하다면 범죄의 유혹은 얼마나 클 것인가.

 상문고 비리의 경우 그 보호망은 교문 밖 멀리 권력의 이곳저곳까지 광범위하게 뻗어 있었다. 성적 조작, 외화도피 등 갖가지 잘못을 저질러도 안전하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 ‘공모 조직’의 단단한 보호는 힘 없는 교사들이 희생을 각오하고 양심 선언에 나섰을 때 비로소 무력해졌다. 이문옥 감사관과 한준수 군수의 경우처럼 정의의 실현은 여전히 소수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내신성적 조작은 대책만 적절히 세우면 막을 수 있다. 우리 교육의 문제가 이것 하나만은 아니다. 1인당 소득이 7천달러나 되는 풍요한 사회라면 그 구성원의 도덕적 수준도 따라서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감시만으로 사회 발전과 행복의 증진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우리 경제가 부닥친 벽도 기술 개발의 한계만은 아니다. 오히려 가치관의 한계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교육다운 교육을 잃어버린 것이야말로 문제이다. 그 증거는 도처에서 나타난다. 얼마 전 어느 사찰에는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조용히해 달라는 간청과 함께 인솔 교사를 향한 이런 당부 말씀이 붙어 있었다. ‘선생님, 우리의 아이들에게 굳건히 지켜야 할 우리의 것과 경건해야 할 어떤 장소가 있음을 가르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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