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그룹 ‘극비 투자’ 드러났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4.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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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들은 북한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투자사업들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 왔을까. 김일성이 죽기 전인 7월 초 정상회담에 대비하여 실무작업을 하던 정부 관계자들은, 기업들의 북한 투자사업들이 하나같이 베일에 싸여 았다는 점을 알고 크게 놀랐다.

 재벌 기업들의 도박판처럼 돼버린 북한 투자사업에 관해서는 정부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무지했던 것이다. 물론 북한과 교역하거나 북한인을 접촉하려면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그것만으로 기업들 간의 경쟁적인 물밑 거래를 파악할 수는 없다.

 상공부는 7월 4일자로 각 재벌 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북한 투자사업을 모두 신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상은 북한 프로젝트에 열을 올리고 있는 10대 그룹. 과거에 추진하다 중단된 사업들까지 빠짐 없이 신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벌 기업 간의 과당 경쟁을 막고 투자 사업의 우선 순위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 기업들이 은밀히 추진하는 사업을 정부가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상공부의 입장이었다.

 반면 대북 사업을 구상중인 기업들은 정부의 이런 요청을 쓸데 없는 것으로 여겼다. 한 그룹의 북한 전담반 실무자는 “그동안 재계의 북한 투자 사업을 도와주기는커녕 늘 훼방만 놓던 정부가 지금 와서 교통 정리를 하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무역협회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같은 민간 조직을 통해 북한 투자를 둘러싼 재계의 입장을 정리하려 하고 있다.

 결국 상공부가 지정한 시한인 7월7일까지 두 재벌 그룹이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고 버티는 상황이 벌어졌다. 자기들이 추진하는 사업에 관한 정보가 경쟁사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염려했을 것이라는 것이 상공부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런 와중에 김일성 사망이라는 급보가 전해졌다. 재벌 기업들은 그동안 추진해온 북한프로젝트가 당분간 유보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 기간에 더욱 더 대북 투자사업의 선후 관계를 분명히 해두고 싶어할지 모른다. 이렇게 판단한 두 ‘항명’ 그룹은 자기네가 추진해 온 사업을 자진 신고하기로 이르렀다.

각개약진으로 이미 많은 사업 진행

 각 그룹의 신고 내역을 살펴보면, 이미 여러 그룹이 각개약진 식으로 상당히 많은 사업을 진척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대우그룹은 이미 알려진 것과 같이 남포 경공업단지 조성을 가장 먼저 추진할 계획이다. 한국측은 지난 92년 1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방북했을때 북측과 이 사업에 합의한 이후, 같은 해 10월에는 현지에 민관 합동 조사단을 파견하기도 했었다. 특히 북한측은 이지역에 셔츠와 블라우스, 재킷, 가방 공장 3개를 이미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남북 경협이 재개되기만 하면 대우는 이 분야 사업을 즉각 추진하려 한다.

 럭키금성그룹의 최대 관심사는 김책제철연합기업소와 조선유색금속수출입회사 지원사업, 북한측은 두 기업의 정상화를 위해 자금과 시설 지원을 바라고 있다.

 미원그룹은 92년 7월 북한측 광명성총회사와 각종 장류(간장.된장.고추장) 제조합작사업에 합의한 상태다. 이 그룹은 2000년까지 각종 농수산물 가공 사업과 관광개발사업을 계획해 놓고 있다. 동양그룹은 93년 6월 북측의 금강산국제그룹과 광명성총회사와 지분을 절반씩 한다는 조건으로 시멘트 합작사업에 합의했다.

 전통적으로 북한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보여왔던 현대.삼성.코오롱 그룹은 이미 알려진 자원개발, 가전제품 조립생산, 임가공사업을 계속 추진해 왔다. 이들 외에 선경.한일.한화 그룹이 새롭게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신고로 드러났다(10대 그룹이 추진중이거나 계획하고 있는 북한 투자계획은 도표 참조).

 상공부는 각 기업의 북한 진출 현황을 청와대에 직접 보고했다. 정부가 이들을 어떻게 조정할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다만 각 그룹의 개별 사업 차원에서가 아니라 대북 전략차원에서 북한 투자 사업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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