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문화로 정착돼야 할 비디오
  • 편집국 ()
  • 승인 1990.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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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액션물, 편당 폭력장면 31분 청소년 60% 저질비디오 시청 경험

 고막을 찢을 듯한 강력한 금속성 음향과 함께 디스코테크의 문을 박차고 괴한 일당이 침입한다. 잭나이프 하나가 식탁 위로 날아와 꽂히고 스트립 걸들이 몸을 뒤틀며 여체의 향연을 벌인다. 밤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족의 영상 위로 무대 위를 기어 다니는 스트립 걸들의 기묘한 동작이 겹쳐지고 이어서 여체를 애무하는 손길. 다시 한 무리의 남녀가 엉크러져 뒹굴고 비트사운드의 음악이 더욱 고조된다.

 요즘 10대 사이에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이다. 최근 서울시내에 뮤직비디오 전문 감상업소가 늘어나면 그간 누누이 얘기돼온 도색비디오와 함께 폭력성 뮤직비디오가 청소년의 정서를 좀먹는 새로운 폐해로 부각되고 있다. "방학중이 아니더라도 불경기란 게 없어요. 아침 10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문을 열기 무섭게 들어오지요." 객석 2백 30석의 대형업소에 속하는 종로3가 ㅇ레스토랑의 DJ 구희정(29)씨는 이곳의 분위기를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고 소개하면서 선정적인 뮤직비디오만을 전문으로 보여주는 여타 업소의 고객 대부분이 10대라고 귀띔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홍콩액션비디오 물은 전국 2만여 비디오가게의 주종 대여 품일 뿐 아니라 중계용 유선 TVㆍ목욕탕ㆍ식당ㆍ만화가게 등의 단골 프로가 된 지 이미 오래다. 홍콩액션물은 한결같이 범죄조직 속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아래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는 특성을 보인다. YMCA의 '건전비디오문화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하 '건비연')이 지난 1월 시중의 홍콩액션물 40편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편당 서로 치고 받는 폭력장면이 평균 31분으로 전체 상영시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작품에는 총기난사ㆍ칼부림 등이 비일비재하고 무엇이건 손에 잡히는 대로 휘두르는 장면이 속출, 모방성과 호기심이 강한 청소년에게 폭력을 가르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유치원ㆍ국민학교 어린이에게 가장 폐해가 큰 비디오 물은 주로 일본이나 미국에서 마구잡이로 들여온 로봇ㆍ공상과학 만화 영화이다. 이들 로봇만화물은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만화비디오의 70%점하고 있는데, 과학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키워준다는 본래의 제작취지를 벗어나 우주전쟁이라는 획일적 소재하에 로봇을 단지 전쟁무기로만 그리고 있다. 또 문제해결 방법에 있어서도 힘에 의한 강자의 승리라는 '힘의 논리'가지배적이다. 등장하는 무기의 가지 수도 수십 종에 이를 뿐 아니라 "쏴라" "죽여라" "해치워" 등 적의와 폭력성을 띤 대사를 남발, 어린이의 심성을 공격적으로 만들 우려가 있다. 역시 수입물이 대부분인 순정만화비디오의 경우도 서양 이름의 주인공에 서구적 외모, 귀족사회가 주류를 이루는 이야기의 배경, 천편일률적인 전근대적 여성상의 강요 등으로 어린이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줄 소지가 매우 높다

 

국민학생의 90%가 방학 동안 5편 시청

 이처럼 청소년이나 어린이에게 유해한 비디오가 범람하는 실정에서 서울지역 청소년의 월평균 비디오 시청편수가 2.5편이라거나, 혹은 방학기간 중 국민학생의 90%가 평균 5편씩 비디오를 보았다는 통계치(89년 YMCA의 '건비연'조사)는 여름방학을 맞이한 학부모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청소년의 60%, 국민학생의 36%가 성인용 음란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는 충격적 조사결과는 우리 '비디오문화'의 현주소를 알리는 적신호이다. "은밀한 곳에 숨어서 보는 도색영화는 말한 것도 없고 아이들이 비디오 점에서 빌려 다 보는 비디오조차 비교육적인 줄은 알지만 교육용 비디오는 가격이 엄청나 살 엄두조차 낼 수 없다"고 학부모들은 한숨 쉰다.

 자연 과학물이 주류를 이루는 수입 교육용 비디오테이프의 가격은 현재 편당 2만5천원에서 4만원선, 어학 교재용 비디오테이프의 경우는 최고 편당 7만원까지 한다. 3년 전부터 교육용 비디오를 수입하고 있는 SKC측은 "지금은 일반인보다 교육기관이 주고객이므로 판매율은 저조한 형편"이라고 밝히면서 "시리즈당 3만~4만달러의 판권료를 지불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격 인하는 힘들다"고 설명한다

 한편 교육용 비디오의 고가화는 '싼것'을 찾는 소비자의 수요수준과 맞물려 불법복제상의 공공연한 암거래를 조장하고 있다. 복제상은 팔릴 만한 교육용 비디오를 대량 복제하여 시중가의 3분의1 내지 4분의1 가격에 일시불제를 채택, 소재지를 숨긴 채 전화 한통에 즉시 배달로 거래를 성사시키고 있다. 이처럼 무단 복제가 횡행하는 이유는 그간 불법제작에 대한 처벌규정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라는게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정부는 현재 불법제작자에 대한 처벌규정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에 상정, 심의를 받고 있는데 이 법안에 따르면 종래 2년 이하의 징역, 혹은 3백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돼있던 불법 제작자들이 3년 이하의 징역, 혹은 2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그런데 문화부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공윤의 심의에 오른 비디오 중 수입물이 3쳔편, 국내제작물이 3백편으로 비디오의 국내제작은 현재 매우 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나마 어학교재 위주의 학습용이 대부분이고, 극영화부문의 제작이 늘고는 있으나 저질 수입영화 뺨치는 저질 비디오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당초 저질 국내비디오 영화의 제작이 급증한 이유는 미국비디오 배급 회사인 CIC의 국내직배와 수입물에 대한 대기업의 독점계약으로 중소프로덕션의 외화판권 구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연간 1백편 정도로 제작편수가 한정되 어 있는 국산영화의 판권료가 대폭 인상된 것도 중소프로덕션들로 하여금 자구책을 마련하도록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요즘 국산영화의 편당 판권료는 약 5천만원 정돌 '매춘' 같은 인기작의 경우 억대를 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상업성만을 노린 중소프로덕션이 2천만원대의 빠듯한 제작비로 보통 2주일만에 1편씩 성애물을 졸속 제작함으로써 비디오 문화를 오염시키고 있다.

 국산 비디오영화의 저질화를 막기 위해 일각에서는 현재중소기업육성법에 의해 중소기업의 고유업종으로 묶여 있는 비디오물의 제작을 과감히 대기업에 개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중소프로덕션들은 그 같은 주장에 대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며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대기업이 수입물 판매를 독식하고 있는 마당에 국내물의 제작까지 얹어줄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정부의 적극적 정책지원 있어야

 정부는 중소프로덕션의 건전한 창작 기획물 제작을 유도하기 위해 지난 4월부터 기획ㆍ제작ㆍ판매단계에서 프로덕션과 정부 관련부서를 연결해주고 있는데, 예산이 전혀 책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정적 지원만을 펴고 있어 실효를 거두기 어려운 실정이다. 문화부 관계자는 이들 창작물의 주된 내용은 한국의 전통문화, 생활예절 및 관광안내, 청소년에 관한 기획 등이며 6월 현재 1백 20편의 제작을 완료, 올해 말까지 2백편을 완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건전비디오의 보급이 부진한 상태에서 KBS와 MBC 양 방송사가 판매하고 있는 자사방영 프로그램의 공급 또한 시청자의 폭증하는 정보욕구를 총족하기에는 매우 취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81년부터 비디오를 시판해온 KBS의 경우, 현재 지방에 10개의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월평균 판매량은 약 1천편 정도이다. MBC의 판매량은 월 1백편 정도로 교양특집물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KBS에 비해 자연다큐멘터리나 전통문화다큐멘터리등의 기록물이 많이 팔리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 사회에 건전한 비디오문화가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을 크게 정리해보면 비디오를 단순한 오락의 매체로만 여기는 그릇된 인식, 불법제작에 대한 느슨한 처벌규정, 정부의 적극적 정책지원 부재 등으로 요약된다. '건비연'을 통해 건전비디오 보급에 앞장서온 YMCA 李??  (33)간사는 "시청자가 좋은 비디오를 선정하는 안목을 갖추는 일이 급선무"임을 강조하면서 " 그 가능만 회복된다면 현재 방영중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녹화를 통해서도 좋은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욕구를 어느 정도까지는 해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디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서만 시청자의 능동적 선택이 가능하고 능동적 선택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비디오가 건강한 가족문화 창출에 제몫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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