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되살린' 중국 고전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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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지≫ ≪금병매≫ 등 한국 일본 대만 연변서 현대화 작업 활발

 山高水長, 군자의 덕행이 산처럼 높고 물처럼 굽이침을 이르는 이 말은, 산이 높으면(혹은 높아야) 물이 길다는 뜻으로도 ‘오독??할 수 있겠다. 최근 출판계의 한 장르로 뿌리내리고 있는 중국 고전소설의 현대화 바람을 보면 '문자 그대로의 산고수장'이 떠오른다. 동북아 문화의 봉우리를 만들었고 그 자체이기도 했던 중국 역사 속의 인물들과 그들이 엮어낸 파노라마는 오늘날 한자문화권에 그대로 흘러내려오고 있다.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 국가와 인간, 국가와 국가 사이의 원형질적 관계를 넉넉하게 담아내고 있는 중국의 고전소설들은 그래서 ‘슈퍼 베스트셀러 작가'인 이문열씨로 하여금 '삼국지로 못할 이야기가 없다'는 말을 '삼국지로 내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는 장담으로 바꾸게 하기도 했다. 중국 고전의 '갱신' 작업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대만, 특히 일본에서 일정한 주기를 타면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중국 고전은 출판의 광맥"
 서점을 둘러보면 이미 80년대 초반에 나와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정비석씨의 《손자병법》(전 4권) 등과 나란히 88년에 초판을 낸 이후 1백만부 가량 팔린 이문열씨의 《삼국지》(전 10권) 에 이어 그가 최근 펴낸 《수호지》(전 6권)가 진열되어 있다. 이문열씨와 함께 중국 고전 현대화 작업에 팔을 걷어붙였던 조성기씨의 《전국시대》(전 3권) 《굴원의 노래》《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도 눈에 띈다. 이문열 조성기씨의 고전 현대화 작업은 한글세대 작가에 의한 한글세대를 위한 것이어서 손길이 더 간다.

 중국 고전 출판은 그러나 번역물에서 훨씬 강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40대 중견작가들 가운데 이문열, 조성기씨 이외에는 중국 고전의 봉우리를 탐사하는 작가는 거의 없다. 한문에 능통한 한글세대 작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대신 중국 일본 연변 교포 작가들이 새로 엮어낸 중국 고전소설들이 연달아 우리말로 옮겨지고 있다. 중국 태생으로 일본에서 살고 있는 진순신은 일본에서도 엄청난 독자를 끓어모으고 있는 역사소설가로 올해 초 일본에서 낸《소설 제갈공명》이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소설 강태공》(전 4권)에 이어 최근에 나온 《소설 이태백》(상하 권)은 연변 교포 작가인 이여천의 작품이고, 올해 안으로 나올 《금병매》(전5권) 역시 연변 교포 학자들이 번역한 것이다.

 길게는 3천년 전 고전의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같은 출판 현상은 어떤 지류들을 형성해나가고 있으며, 또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 고전의 한글화·대중화에 앞장서온 민음사는 이문열의 《삼국지》를 펴낸 이후 지난해 김구용 시인이 완역한 《열국지》와 《수호지》 등의 소설류를 기둥으로 세우고 《논어》《맹자》등은 물론 최근에는 고은시인이 쓴 소설 《화엄경》을 발간, 소설 한시 선시 사상 그리고 불경에 이르기까지 출판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민음사 대표 박맹호씨는 “중국 고전은 출판의 광맥이며 고전의 현대화 바람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한다. 고전은 천년 넘게 인구에 회자되면서도 탈색되지 않는 생명력을 지나고 있으며, 거울처럼 늘 지금?여기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모든 고전은 당대의 감수성에 걸맞게 새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박씨는 최근 유종호 교수의 《이솝전집》을 선보여 중국 고전은 물론 서양의 고전까지 손대고 있다.

 이문열씨의 중국 고전소설은 지난 50?60년대 한 세대 위의 작가들에 의해 쓰여졌던 중국 고전소설 이후의 공백기를 끝막음하면서도 앞 세대 작가들의 작업과는 구별된다. 선배작가들이 옮긴 중국 고전소설들은 본격적인 글쓰기가 아닌 ‘밥벌이를 위한 과외??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번역의 충실도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문장 또한 유장하지만 구투였다. 그러나 이문열씨가 평역한 소설들은 충실한 자료 조사와 원문의 정확한 번역, 그리고 한글세대들의 독서 감각에 맞는 문체와 교양주의 바탕하고 있다.

 이문열씨의 작업들이 텍스트와 정면으로 맞선 결과로 얻어낸 성과라면 조성기씨의 고전소설들은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 혹은 여러 텍스트에서 뽑아낸 뼈대에 문학적 상상력의 살을 붙인 것이어서 창작에 가깝다.《전국시대》는 《전국지》라는 원전이 없다.《사기》《전국책》《시경》《열국지》등 전국시대(BC 403?BC 221)와 관련된 무수한 책들에서 추출한 것이다. 조씨가 펴낸 《굴원의 노래》《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도 원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굴원의 노래》는 전국시대를 살다간 중국 최고시인의 생애와 시정신을 소설화한 것이고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는 소설 형식을 빌린 《맹자》강해이다. “이 책은 전국시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국시대를 빌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과 문제점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라는 조씨의 《전국시대》머리말은 붐을 이루고 있는 (중국)고전 출판의 당위성을 함축하고 있다.

“일본 출판 행태의 직수입 아닌가??
 일제 강점기와 전쟁, 서구 교육제도의 도입, 경제성장 제일주의라는 일방통행, 그리고 70?80년대의 정치 사회적 회오리바람은 한자문화 즉 고전과의 단절 현상을 빚고 말았다. 김팔봉 박종화 김동리씨 등 한국 현대문학 초기 세대들의 고전 재해석 작업은 당연히 30년 가까운 진공상태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일본이 10여년의 간격을 두고 그때마다 중국 고전들을 새롭게 출판,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것과는 좋은 비교가 된다. 국내의 중국 고전소설 붐은 일본의 그러한 출판 경향과 무관하지 않아서 “일본 출판 행태의 직수입이 아닌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한문을 어학으로 새로 배워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면 번역물 버맘을 한데 묶어 비난만 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중국 고전 재해석 바람은 민음사처럼 한 출판사의 다양한 기획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 출판사들이 각기 소설 이외에도 노장사상 등을 비롯, 중국의 불경을 책으로 내놓고 있다. 장자를 우화로 빚어낸 윤재근교수의 《장자…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와 그 2탄격인 《털끝에 놓인 태산을 어이할까》는 베스트 셀러를 지나 스테디 셀러로 진입해 이른바 철학우화 선풍을 낳게 했다. 우화 형식으로 독자를 모으는 출판 현상은 라즈니쉬로 대표되는 인도 신비주의서적 출판 붐과 맞닿아 있다는 분석도 있다. 라즈니쉬의 ‘우화??들은 노장 사상과 불교의 세계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같은 대중용 기획 말고도 세계사의 ??마음글방?? 시리즈, 고려원의 ??라르마총서?? 같은 전문적인 불경 해설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고전 현대화 바라에는 80년대의 사회과학 출판사들도 일부 참여, 독자들의 변화를 짐작케 한다. 청년사는 중국 학술사상·어학시리즈와 함께 《삼국지》(전 6권) 《수호지》(전 7권) 등을 펴낸 바 있으며 곧 《금병매》를 서점에 내놓을 계획이다. 이론과 실천사는《중용》《대학》《노자》《장자》등을 번역할 계획이며 도서출판 세계는 《삼국지 인물론》을 최근 번역, 출간했다. 하지만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모임인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한출협) 김영종 회장(사계절 대표)은 사회과학 출판사의 이같은 참여를 “동구?소련의 변화와 한국 사회의 보수화 추세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면서 ??이 분야의 책들은 시작단계이며 아직 평가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중국 고전을 새로 일구어내는 이같은 현상은 우리나라 및 서양 고전의 재해석 작업을 유도하면서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10년 정도의 주기로 리바이벌되는 것처럼, 영화보다 훨씬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전들은 앞으로도 새로운 독자층을 위해 새롭게 변주될 것이다. 그러나 염려의 시각도 적지 않다. 작가이며 언론인인 최일남씨는 《시사저널》(9월 19일자) 연재 칼럼에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중국 고전 내지 영웅소설 붐과 라즈니쉬의 ‘배꼽 현상??이 국내외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상적 허무주의의 ??허무?? 풍토와 연관된 것은 아닌지??라고 우려하고 있다. 중국 고전의 광활한 평원에서 존재론적 모색을 갖는 것도 좋지만 이  ??도덕성과 결벽성의 세례를 거치치 않은 졸부 자본주의?? 속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염두에 두고 ??부정해야 할 대상들을 알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이같은 출판 붐을 날이 갈수록 촘촘해지는 국내외 저작권의 그물을 피해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동양 고전들은 지적 소유권에 저촉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염려되는 문제는 출판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얄팍한 상업주의이다. 고전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역량과 철저한 기획 없이 단지 상업성만을 고려하다가는 고전의 장강은 ‘흙탕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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