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구 칼럼] 역사를 움직이는 정신과 희망
  • (본지 칼럼니스트 · 언론인) ()
  • 승인 1990.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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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나라에 무엇이 있는가”고 물은 사람이 있다. 단순하나 평범한 물음이 아니다.

  도대체 이런 질문을 던진 인물이 있다는 건 놀랍고 고맙다. 왜냐하면 인간만사는 물음에서 비롯하고, 물음이 없는 데서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당돌한 물음의 임자는 누구인가. 그건 다른 사람일 수가 없다. 申采浩(호 丹齊, 1880~1936)다. 지난 1세기 동안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더할 수 없는 깊이에서 그 절박한 의문을 표출할 수 있는 정신이 누가 있을까. 그 기간에 한국인은 흥망성쇠의 모든 것을 겪었다. 상고로부터 이 땅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겨레에게 20세기는 모진 시련을 가져왔다. 재난이야 모두가 함께 겪었지만, 신채호는 그 고난을 통해 겨레에게 역사의식 · 주체의식 · 희망사상을 불어넣었다.

  해방 45년을 맞는 이 8월에 丹齊정신이 그리워짐은 웬일인가. 신채호는 사상 · 문필 · 행동에서 그럴 수 없는 일관성과 통합성을 이루었다. 기이하다. 그의 빛나는 史草는 그가 외적의 철창에 갇혀 있을 때 모국의 신문에 연재되어 겨레의 심혼을 떨쳐 일으켰으니.

  그의 열혈로 이뤄진 모든 문자는 그의 사유와 역사정신의 소산으로 불멸의 민족혼의 금자탑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思想圈에서 숨쉬고 있다.


암흑 속에서 희망의 등불 치켜든 申采浩

  단재가 “무엇이 있는가”고 물었을 때, 과연 그는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이 무엇의 무엇을 헤아려봄은 흥미있다. 다행히 그는 그 무엇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으니. 교육에 열심하여 미래인물을 길러낸 대교육가, 식견이 우월하여 국민을 계발한 대신문가, 또 대철학가 · 대문학가, 또 대이상가 · 대모험가가 그것이다.

  세기초의 한국인의 형편과 세기말의 한국인의 현실은 크게 달라졌다. 이 엄청난 변동을 눈앞에 보고 곰곰 생각하여도, 우리는 신채호가 한몸으로 대언론가요, 대사상가요, 대문장가요, 또 대이상가요, 대모험가임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단재는 세기초에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논진을 폈고, 망명 뒤에는 블라디보스토크 · 북경 · 상해에서 언론활동을 쉬지 않은 한편, 국내신문을 통하여는 역사론을 편 대논객이요, 대역사가이다. 또 그는 거침없이 사상 · 도덕 · 사론 · 혁명론을 개진한 대사상가이다. 헤로도투스의 《역사》가 대문학이란 뜻에서, 단재의 문자는 빛나는 문학적 텍스트이다. 일찍부터 그의 “문장의 俊偉는 근세에 匹敵이 없는 것”(정인보)이라는 평이 있다. 또 교육에 있어서는 향리와 망명지에서 청년교육에 힘을 쏟은 선구자이다. 놀라운 것은 그가 암흑 속에서 희망의 등불을 치켜든 대이상가이고, 또 무엇보다 억압에 굴하지 않고 끝내 意氣를 지켜간 대모험가인 점이다.

  그의 言說은 아직도 신선하다. 젊은 단재는 겨레의 꿈꿀 권리를 고취하였다. “희망이란 것은 만유의 주인이라… 민중의 희망으로 곧 나라가 있으며….”

  그는 희망의 싹이 언제 어디서나 고통시대에 있다고 설파하였는 바, 단재가 노도질풍의 세기에 피어오른 현대 희망사상의 원천임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서방의 새 희망사상은 1930년대초에 나치즘의 불길한 그림자를 보며 싹텄고(마르셀), 유태정신의 離散 속에서 집성되어(블로흐) 20세기 사조의 한 奇觀을 이뤘음은 잘 알려졌다. 그에 훨씬 앞서서 햇빛을 본 단재의 글 ‘대한의 희망’(1908)은 동방의 이채로운 독자적 희망론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겨레의 주체적 결단 업이는 역사의 소생과 전개 불가능

  “오늘 우리 한인아, 희망에서 願力이 나고, 원력에서 열심이 나고, 열심에서 사업이 나고, 사업으로 나라가 나나니, 힘쓸지어다 우리 한인아, 희망할지어다….”

  그런데 역사의 정신이랄까, 역사를 움직이는 불은 정신이라고 단재는 확신하였다. 그에게 정신의 현실적 구조인 민족공동체의 추구는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노력이어야 한다. 역사에서 정신이 추구하고 지탱할 모듬살이는 우선 정치적이라도, 그것은 또 도덕 · 예술 · 과학 등 모든 인간제도를 포함하니 다름 아닌 인간의 정신적 창조성으로 가름된다.


  도덕적 드라마로서 역사의 전망은 동서 어디서나 역사에 대한 주된 직관이고 자세라 하겠으나, 단재의 독특한 기여는 겨레가 현실적으로 암흑에 떨어져 언제보다도 인간성과 정신성의 소생이 긴요한 갈림길에서 그런 역사정신을 제시하고 실천한 것이다.

  결국 단재는 겨레의 주체적 개입이나 결단 없이는 역사의 소생과 전개가 가능하지 않음을 삶과 죽음으로 증거하였다. 그는 산 역사를 위해 생명을 바쳤고, 그 보람으로 그의 정신으로서의 역사는 굴절되지 않은 광채를 발한다.

  그에게 세계는 정신의 역사이고, 또 역사는 민족의 변천 · 消長의 자취이다. 역사가 있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흥하고 역사가 이미 없으면 망국에 이르게 되니, 그러므로 역사의 보람은 그렇게 신성한 것이라고, 그는 분명히 하였다.

  역사는 현대사이고 기록은 지나간 역사이다. 역사는 무엇보다 사유의 소산이고… (크로체). 현재의 삶의 관심이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의 사실을 탐색하게 하고 과거는 역사가 된으로써 이미 과거가 아니고 현재가 된다. 이렇듯 역사에 있어서 삶과 사유의 불가분의 통일이 신채호의 역정에서 확인된다. 그의 뜻처럼 큰 역사와 아름다운 희망을 위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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