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2.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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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난 李御寧 문화부 장관에 대한 평가는 “만일 전 이장관이 아니었다면 성과보다는 한계가 훨씬 많았을 것”이란 가정법 아래서 비교적 후한 점수를 받는다. 지난해 1월4일 문화부가 문화공보부에서 독립해나올 때, 독립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며 문화예술계는 박수를 보냈다.

문화부의 위상을 정립하고 문화를 행정의 차원이 아닌 생활의 개념으로 변화, 확대시킨 그의 ‘문화주의’는 출범 초기부터 적지 않은 바람을 일으켰다. “기다리지 말고 (생활 현장속으로) 들어가자”는 그의 방법론은 ‘쌈지공원’, 움직이는 국립극장, 움직이는 박물관, 움직이는 도서관 등으로 이어졌다. 이같은 프로그램들은 문화부의 궁핍한 살림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국민은 물론 관료들의 문화에 대한 경직된 시각을 교정하는 데 이바지 했다.

하지만 ‘뭔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 나머지 “신설 문화부가 이벤트부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비판이 초기부터 나왔으며, 연극영화의 해 제정을 전후로 연극계의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의 문화주의는 간혹 현실과 유리되기도 했다.

미래지향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로 알려진 그의 개성은 ‘문화발전10개년계획’에서 발휘되었다. 예술행정에도 밝은 음악평론가 이상만씨는 “초대 장관으로서 문화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교적 올바르게 세워놓았다”면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생활 문화의 뿌리내리기, 문화발전의 청사진 제시와 더불어 전 이장관의 업적으로 꼽히는 것은 도서관 업무를 교육부에서 문화부로 이관시킨 것과 박물관법개정, 국립국어연구소 설립, 국립예술학교 설립계획 등 문화 발전의 기본틀 마련이다. 이외에도 지난해 여름과 겨울에 있었던 남북음악인교류, ‘이달의 인물’ 선정, 연극영화의 해 제정 등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초대 문화부의 성과 목록에 들어갈 만하다.

문화부의 한 실무자는 “예산 부족 때문에 장관이 기업체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하는 등 악전고투했다”면서 “그는 온몸으로 뛴 장관”이라고 말했다. 전 이장관에 대한 총평은 “문화부는 다른 행정부처와 달라 그 임기가 최소한 3년은 보장돼야 한다”는 지적으로 매듭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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