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할 철학의 오만함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5.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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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주·이정우 두 ‘토종 철학자’, 한국의 왜곡된 학문 풍토 통렬히 비판

플라톤의 <공화국>에 등장하는 ‘동굴의 비유'는 완고해 보이는 현실이 혹시 우리가 그저 길들어 있을 뿐인, 여기서 태어나서 살아가므로 그냥 받아들일 따름인 동굴이 아닌가 하는 원초적인 의문을 제기해 준다. 철학을 한다는 행위는 이 현실에 대한 물음, 즉 동굴에서 벗어나려는 행위이거나 길들임에 대한 최초의 저항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철

학, 특히 한국 땅에서 ‘철학함’이 얼마나 철학의 기본 정신에 충실하고 있느냐 하는 물음에 이르면 그 대답은 자못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왕주 교수(부산대·철학)

는 최근 간행된 그의 책 <철학살이, 철학 풀이>(민음사)의 앞글에서 실로 엄청난 선언을 하고 있다.

“철학자부터 반성하라”

 ‘철학이 본래 삶의 일인데 왜 그것이 오늘날 그리 창백한 모습으로 우리 관심에서 소슬하게 비켜서 있는가. 아마 철학이 순전히 학문의 소관사로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서재에서 졸고 있는 철학도의 머리, 추상의 구름 위를 달리는 저술가의 붓끝은 결코 철학가

의 고향일 수 없다. 풍진만장한 저자 거리의 삶이야말로 탈레스 이래 바뀐 적 없는 철학의 영원한 토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철학을 학자들의 손아귀에서 빼앗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왕주 교수는 왜 철학을 먼저 학자들의 손아귀에서 빼앗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가. 이교수는 ‘우리는 철학을 배울 수 없고 오직 철학하기만을 배울 수 있다’라는 칸트의 유명한 말, <순수이성비판>의 말미에 덧붙이고 있는 아포리즘을 한국의 철학 교육이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 땅에서의 철학함이 철학하기를 가르치기보다는 철학 그 자체를 가르치려 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철학이 순전히 학문의 소관사로 떨어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교수는 “현재 대학 철학과 커리큘럼을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철학이 아니라 철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철학과 4년 간의 공부가 탈레스나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여 현상학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명멸했던 철학자들의 이름만을 나열하는 역사 공부에 바쳐지고 있다. 이는 사학과의 영역으로 넘겨도 전혀 무리가 없는 부분이다”라고 지적한다.

 이교수가 생각하기에 대학에서의 철학 교육은 어떤 사람이 (하이데거이건 메를로 퐁티이건 자크 데리다이건 간에 상관 없이) 왜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지, 그가 어떤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반복 암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교수는 이제 학자들이 철학을 공부하려 하지 않는 학생이나 일반을 꾸중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자기들에 대한 반성부터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한다. 표현 능력이 모자라 <순수이성비판>이 그 지경으로 어려워진 것에 책임을 느낀 칸트가 골자를 추리고 말을 쉽게 바꾸어 <프롤레고메나>라는 책을 새로 쓴 사실이나, 데카르트가 라틴어로 논문을 쓰는 당시 학계의 관례를 깨고 일상어로 저술한 것과 같은 노력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색은 통풍되어야 한다. 철학책은 입혀야 하는 것이다. 고대 금석문이라도 판독하듯 어렵게 읽어야 하는 철학책들을 이제 흔쾌히 조소할 수 있어야 한다. 사색에는 정열을 쏟았으나 표현과 이해에 태만했던 철학자들의 방자함과 불손함을 무턱대고 용납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한다.

메타과학의 껍데기만 소재

 이왕주 교수의 <철학 살이 ,철학 풀이>가 한국 땅에서의‘철학하기’를 비판한 책이라면, 이정우 박사의 <담론의 공간>(민음사)은 미셀 푸코에 대한 연구서인 동시에 이 땅의 왜곡된 철학 흐름을 지적한 책이다. 60년대에 한국 땅에서 철학을 한다는 것은 흔히 ‘데·칸·쇼’를 공부하는 것, 즉 데카르트와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공부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국내 대학의 철학과 분위기는 데칸쇼적분위기에서 그다지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이정우 박사는, 독일과 가까웠던 일본에서 서양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기 때문

칸트나 헤겔을 거의 신처럼 떠받드는 독일 관념론의 영향이 너무 지배적이라고 지적한다. 그 이후 실존주의가 들어오면서 하이데거주의자와 사르트르주의자가 번성하게 되었고, 그 뒤를 바로마르크시즘과 분석철학이 이었기 때문에 콩트나 바슬라르 같은 학문 태도, 즉 프랑스 중심의 실증적·합리적·구체적 방법론이 한국에서는 거의 소외되어 왔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콩트적인 철학함보다는 칸트·헤겔적인 철학함이 주류를 이루어 왔고, 인문학이라는 테두리로 분류된 철학(과)이라는 행정적 구분 자체가 칸트·헤겔적인 철학함의 개념적 전제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콩트·베르나르·쿠르노 등에서 오늘날의 푸코·세르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어 온 프랑스 메타과학의 전통은 폭력적인 총체성이 아닌, 학문사이의 소통을 통한 총체성으로 나아가는 철학함의 예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계 철학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우리의 철학과 커리큘럼에서 바로 이 전통만큼은 완전히 소외되어 있는 것이다. 설사 베르그송·바슬라르·퐁티·푸코 등 몇 사람의 철학자가 산발적으로 소재되었다 해도, 이들의 메타과학적 바탕은 철저히 배제된 채 그 껍데기 같은 모습들만이 소개되고 있다. ”

 이정우 박사가 여기서 강조하는 메타과학적 학문, 즉 (다른 학문에 대해) 폭력적인 총체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끼리 소통 체계를 가진 학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레비 스트료스나 미셀 푸코가 철학과 인류학 혹은 고고학을 연계하고, 바슐라르가 물리학과 철학을 연결하는 학문적 태도이다.

‘하나도 모르면서 모든 것 아는 척’

 그래서 그는 “현대의 선험 철학은 실증적이면서 다원적이어야 한다. 현대 철학은 일정한 개념체계를 만들어낸 뒤 그 체계를 가지고 세계의 모든 부분들을 해석하고자 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철학 방식은 세계에 대한 담론들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성과를 무시한 채 자신이 만들어낸 개념 체계를 고집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하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아는 척하는 무리를 범하게 될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철학에 대해 이러한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비판한다.

 그의 이런 지적은 푸코·데리다·알튀세르 등이 철학과 밖에서는 무수한 담론으로 번성하고있는데, 유독 철학과에서 만큼은 배제되어 있는 기묘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만큼 한국의 철학(과)이 케케묵은 전통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바깥과 유리된 채, 다시 말해 동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프랑스 철학 그 자체가 아니라 프랑스적인 철학함이다.

 이왕주 교수나 이정우씨가 이른바 유학파가 아니라 순전히 국내에서의 연구(경북대와 서울대)만으로 박사가 된 순 토종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현재는 비록 독일과 프랑스 혹은 미국을 ‘모국’으로 삼는 학풍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고, 토종들은 아직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나, 데리다 식으로 표현해서 ‘주변부가 핵심을 전복시키는’ 날이 다가올 것으로 전망되기도 한다. 이들의 두 저서는 두터운 각질을 뒤집어 쓴 철학계에 던지는 날카로운 송곳처럼 보인다. ■

趙瑢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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