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없는’ 주한미군 범죄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5.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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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 재판 ‘사각지대’ …9개월간 폭행 시달린 여성 ‘보호받지 못한 인권’ 절규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사는 윤아무개씨(여 · 25)는 요즘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자살을 생각한다.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이웃도 법도 국가도 그의 절박한 보호 요청을 외면했던 지난 아홉달 간의 악몽이 그를 그같은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아직도 자신이 겪은 끔찍한 악몽의 터널에 갇혀 있는 그는 두 주일간 고민한 끝에 젊은 미혼 여성으로서는 차마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사연을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았다.

 그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상대는, 용산 미8군 군속(초청 계약자)으로 근무하는 대니얼 토머스 테일러씨(24)이다. 백화점 판매원이던 윤씨는 지난해 4월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 이태원에 놀러갔다가 그를 처음 만났다. 친구들 중에 미군들과 어울리는 축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미국인이지만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이날 헤어지면서 대니얼은 윤씨의 무선호출기 번호를 적어 갔다.

 

“한국에선 법에 안 걸린다” 겁주며 성폭행 거듭

 그 뒤에도 윤씨는 미군을 사귀는 친구들과 함께 몇 차례 이태원을 찾아 미군들과 같이 춤도 추고 어울리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때 시작됐다. 대니얼은 윤씨가 다른 미군들과 어울리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자기가 점찍은 여자이니 둘이서만 만나자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윤씨가 이에 반발하자 대니얼은 가지고 있던 군용 칼로 자기 어깨를 자해한 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윤씨를 찌르겠다고 협박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가 나를 자기 여자라면서 위협하니까 놀라서 피하게 됐어요. 그 뒤 어느 날 내 친구의 애인 집에 친구와 같이 놀러갔는데 하필 그곳에 대니얼이 와 있었어요. 그날 대니얼은 나에게 다짜고짜 성관계를 요구했어요. 놀란 나는 완강히 거절하다 허리띠와 칼등으로 무수히 얻어맞고 도망쳐 나왔어요.”

 6월 들어 기어이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친구들과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는 윤씨를 발견한 대니얼이 다짜고짜 끌어내 근처 골목으로 데려가 온갖 폭행을 가한 것이다. 그는, 쓰러진 윤씨를 골목 여관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친 성관계 요구를 거절하던 윤씨에게 대니얼은 이 날 ‘마음 먹고’접근 한 것이다. 완강하게 거부하던 윤씨는 대니얼에게 무참히 구타 당한 뒤 온몸이 멍들고 팔다리가 묶인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카메라까지 준비해, 묶인 나의 나체를 찍고 자기가 나를 덮치는 장면까지 한손으로 카메라를 들어 찍었어요. 나는 반항하다가 얻어맞아 고막이 터졌어요.”

 이 날 밤 10시께 풀려난 윤씨는 그 길로 용산 경찰서 관할 용암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했다. 뒤따라 들어온 대니얼은 윤씨가 자기 애인인데 미쳤다고 우겨댔다. 파출소측은 증거가 있으면 가지고 와서 다음날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라며 윤씨를 되돌려 보냈다.

 대니얼은 이때부터 기고만장했다. 한국 경찰은 자기 편이고 한국에서 이런 일은 법에도 걸리지 않는다며 허튼 수작 말라고 윤씨를 윽박지르며 폭행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성폭행 장면이 든 윤씨의 나체 사진을 부모와 친구들에게 공개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윤씨는 어떻게든 부모님께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니얼은 사진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며 틈만 나면 윤씨를 불러내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 윤씨는 필름을 빼앗을 기회를 잡았다. 명동에 있는 한 사진관에서 대니얼이 필름과 현상된 나체 사진을 찾을 때 틈을 보아 이를 낚아챈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대니얼에게 붙잡혀 거리에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경찰 “교양 있는 미국인은 거짓말 안 한다”

 “사람 살리라고 외쳤지만 지나가는 시민들은 전부 흘끔흘끔 보기만 하고 지나쳤어요. 견디다 못해 서있던 빈 택시 앞좌석에 올라 무조건 경찰서로 가자고 했어요. 대니얼도 잽싸게 뒷좌석에 타더니, 자기 여자인데 싸움이 생겼다며 기사더러 해방촌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겁니다. 내가 울면서 사정을 호소했더니, 택시 기사는 이런 미국사람은 반드시 본때를 보여야 한다며 남대문 경찰서 앞에 차를 세워주더군요. 그 끔찍한 아홉달 동안 대한민국에서 저를 도와준 분은 그 분밖에 없었어요.”

 대니얼은 택시가 서자마자 도망쳤다. 다행히 윤씨가 고함을 쳐서 근처에서 순찰중이던 경찰들이 그를 붙잡았다. 두 사람은 외사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윤씨가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경찰서에서도 일은 빗나갔다. 윤씨는 그간의 모든 사정을 털어놓고 살려 달라며 애원했다. 대니얼은 다짜고짜 윤씨가 창녀이며 자기 시계를 훔쳐 도망가려 했다고 우겼다. 경찰은 대니얼의 말을 믿었다. 울며불며 창녀가 아니라고 버텼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교양 있는 미국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상처투성이가 된 제 몸을 보더니, 고소하면 폭행으로 대니얼을 구속할 수는 있지만, 그와 동시에 나도 부녀보호소에 처넣겠다며 사과문을 쓰고 나가라고 하더군요. 기가 막혔지만 그때는 정말 경찰이 무슨 짓이든 못할 게 없을 것이라는 공포심이 들어서 쓰라는 대로 사과문을 쓰고 나왔어요.”

 결국 법도 경찰도 자기를 끔찍한 범죄 소굴에서 꺼내줄 수 없다는 데 절망한 윤씨는 자포자기에 빠져 자살을 결심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죽을 결심을 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어요. 억울해서도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모질게 마음을 다잡았지요. 이제 대한민국에서 나를 지켜줄 사람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호랑이굴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기로 했어요”

 그는 대니얼이 호출하면 달려가 요구를 들어 주는 조건으로 필름과 사진 한 장씩을 빼냈다. 폭행을 당하면 묵묵히 병원으로 가서 진단서를 뗐다. 성관계 때는 반항하지 못하도록 위협용으로 머리맡에 두던 군용칼을 살짝 핸드백에 담기도 했고, 매번 녹음기를 몰래 지니고 들어가 그가 하는 말을 전부 녹음했다. 그 결과 첫 성폭행때 찍힌 나체 사진 40장과 필름, 폭행 · 협박, 사진 공개를 미끼로 돈을 요구(2백만원)한 말을 녹취한 것 등 대니얼의 모든 범행 증거들이 속속 윤씨의 손으로 들어왔다.

 이를 토대로 윤씨는 지난 1월9일 용산경찰서 외사계에 찾아가 고소장을 썼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아직도 불안과 불신에 포위된 상태이다. 부모님이 아직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끝까지 모르게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고, 고소 후 대니얼이 공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크다.

 또 일단 고소는 했지만 지난 수개월 동안 경험한 경찰의 나몰라라 하는 태도를 잊을 수가 없다. “조사 과정에서 남자 경찰들이 처녀성을 언제 잃었느냐, 어느 호텔 · 여관 들을 돌아다녔느냐고 시시콜콜 물으며 시시덕거리고 웃을 때는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나 싶기도 했어요. 여자 형사만 붙여줬더라도 마음놓고 모든 걸 이해시켰을텐데…. 그런 식의 태도를 보면서 저는 고소를 해놓고도 이제부터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을지 안심하기 힘들어요.”

 

가해자, 검찰 송치된 뒤에도 거리 활보

 이 사건은 2월20일자로 강간죄 · 폭행죄가 적용돼 검찰에 송치됐다. 현재 윤씨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대니얼의 보복이다. 사건이 송치됐는데도 가해자인 대니얼은 버젓이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대니얼은 요즘도 수없이 윤씨를 호출한다고 한다. 요즘 윤씨는 밤마다 자기가 대니얼에게 살해되어 한강에 버려지는 악몽에 시달린다. 또 만일 그가 모든 사실을 부모에게 알린다면 그 때는 자살밖에 택할 길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지난 아홉달 동안 무엇하다 이제야 고소했느냐고 의심해요. 경찰조차도 조사 과정에서 오랫동안 대니얼을 만났다는 점을 들면서, 좋아서 응한 화간이 아니었느냐고 추궁합니다. 누구라도 제게 손가락질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봐요.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한마디만 묻고 싶습니다. 내가 그 끔찍한 아홉달 동안 살려달라고 몸부림칠 때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보복 당할까 두려워요”

 2주일에 걸친 설득 끝에 수치심을 이기고 어렵사리 취재에 응한 윤씨는 눈물 섞인 사연 말미에 “그는 보복할 사람입니다. 내가 보호 받을 길이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을 확실하게 보장받기는 어렵다. 대니얼이 한 · 미 행정협정의 적용을 받는 미군 군속이기 때문이다. 한국 수사기관이 그를 체포 · 감금해야 윤씨가 보복을 피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최종형이 확정되기 전에 구금된 미군(군속 포함)은 한 사람도 없다.

 현재 한국 경찰은 미군 당국에 대니얼의 출국 금지만을 요구해 둔 상태이다. 고소 후에도 대니얼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피해자를 찾고 있는 것은 그래서 가능하다. 대니얼은 미군 군속이지만 미국법으로는 군법 회부 대상 될 수 없는 민간인 신분이기 때문에 미군 당국도 그를 구금할 수 없다. 본국송환만 가능할 뿐이다.

 한국 남성이 대니얼과 같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면 마땅히 중벌로 다스려지겠지만 미군(군속)은 이처럼 자유롭다. 불공정한 한 · 미 행정협정 때문이다(54쪽 기사 참조).

 미군 범죄는 연간 천여 건씩 발생하지만 대부분 피해자들의 불만과 억울함 호소로 끝나고 있다. 한국인이면서도 국내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미군 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은 이루 상상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현재 경기도 송탄시 대성병원에 누워 신음하고 있는 강병관씨(42)도 그런 사람이다.

 강씨는 지난 1월21일 새벽 2시께, 오산 미군 공군기지(K-55) 앞에서 미군들과 시비가 붙었다. 일행 중 백인 병사가 강씨집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서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는데 미군들은 이를 시비 거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강씨는 미군 일행 중 바비올 데이(23)라는 흑인 병사에게 멱살을 잡혀 차도로 내동댕이쳐지는 봉변을 당했다. 불행히도 지나던 차와 충돌한 강씨는 뇌를 크게 다쳐 혼수 상태에서 인근 대성병원에 실려갔다. 대수술 끝에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강씨는 현재 정신이상자가 되어 병석에 누워 있는 상태이다.

 일찍이 부인과 사별하고 78세 노모와 국민학교 4학년짜리 아들과 함께 단칸 셋방에서 생활하던 강씨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은 그의 일가족에게 청천벽력과 다름없었다. 한 달 넘게 아들의 병간호를 하고 있는 노모 임분임씨는 “내가 이 아이를 낳을 때도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었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 할머니가 갖고 있는 시름은 아들이 미군 범죄로 사고를 당해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그동안 밀린 병원비 천만원을 마련할 길도 아득한 것이다. 가해자측은 미군이 차도로 넘어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피해 원인이 교통사고라고 주장하며 보상은커녕 병원비조차 한푼도 낼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또 사고 차량 운전사와 보험회사는 뇌손상은 미군의 폭행 때문에 일어났고, 차는 다리부위만 스쳤다며 보상하기를 거절한다.

 밀린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더 이상 치료를 계속하기 어렵다며 치료비 지불을 요구하는 병원측의 독촉에 쫓겨 할머니는 날마다 경찰서로, 송탄시청으로 뛰어다니며 도움을 호소해 보았지만 곤란하다는 반응뿐이었다.

 

일부 피해자, 정신이상 후유증까지

 강씨의 수술을 담당한 이 병원 박진규 신경정신과장은 “환자를 소생시키기 위해 오른쪽 두개골을 드러낸 상태로 수술을 마쳤다. 그러나 인공뼈로 함몰 부위를 만들어 넣지 않으면 뇌출혈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도 3개월 간은 대수술과 치료를 계속해야 하고, 현재 정신이상 상태를 보이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2년 정도 더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되살아나리라는 희망마저 버린 채 아들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는 강씨의 노모는 “퇴원해서 아들의 시신을 내 품에 안게 되더라도 좋으니 집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밀린 병원비를 처리해 줄 수 없나요”라며 울부짖었다.

 강씨를 차도로 떠민 바비올 데이 병장은 현재 평택 주둔 미군 수사당국이 구금하고 있다. 수원 지검의 한 · 미 행정협정 담당자는 “가해 미군을 폭행죄로 입건했으나 아직 기소 여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크고 작은 미군 범죄가 잇따르고, 그로 인해 고통과 후유증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곳곳에 많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한 · 미 행정협정 규정에 묶여 하소연할 곳을 찾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처지이다.

 법무부가 내놓은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92년 10월부터 93년 8월까지 미군 범죄 총 8백50건 중 단 1%인 10건만을 한국 정부가 재판권을 행사했다.

 사건이 사회적 충격을 불러 일으켜 여론의 압력으로 보상과 재판회부를 성공시킨 경우 일지라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93년 5월29일 발생한 ‘김국혜씨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당시 서울 서초동에서 레벤호프를 경영하고 있던 김씨는 이날 밤 용산 미8군 소속 미군 병사 존 로저 살로이 병장(22)에게 성폭행과 구타를 당한 뒤 뇌골절상을 입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범행 안 당하는 것이 상책?

 이 사건은 1년 전 동두천에서 미군 병사 마클 일병이 저지른 윤금이씨 살해 사건의 악몽을 다시금 일깨우면서 사회에 큰 충격파를 던졌다. 여성단체와 시민운동단체가 연대해 연일 항의 시위를 벌이고, 가해자의 구속 수사를 촉구한 끝에 이 사건은 한국 재판부에 회부됐다. 가해자의 신병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미군 당국이 확보하고 있다가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2년6개월형을 선고한 뒤 한국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군측은 김국혜씨에게 병원비(2천만원)와 피해 보상금(1천9백만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김씨는 사건 후 2년이 지난 현재까지 정상이상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생계 수단이던 레벤호프 가게 문도 닫은 상태다.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 대학에 다니는 자녀 둘과 생활하는 김씨는 취재진에게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더라면 이 고통이 없을 것이다”라며 심각한 우울증을 호소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매일 정처없이 배회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생계를 위한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고, 정신이상 증세로 정신적 ·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지만 이 모든 후유증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주한미군 범죄는 ‘불가항력적이고 재수 없는 일’ 정도로 취급되는 풍토도 생겨나고 있다. 사실 일선 경찰에서도 이런 태도는 확연히 드러난다. 미군 범죄를 자주 다루는 평택경찰서의 한 수사 관계자는 “조서를 꾸며 사건을 올려 봐야 기소되는 일도 드물고 피해 보상이 늦어지거나 제대로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웬만한 미군 폭행 사건 신고가 들어오면 ‘똥밟았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라’고 되돌려 보내는 실정이다”라고 말했다. 미군 범죄에 대해서는 한국 수사기관(검찰 · 경찰)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의지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한국 수사권 행사 연평균 1% 그쳐

 물론 최근 들어 이런 추세에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92년 윤금이씨 살해 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부의 수사권 · 재판권 포기 태도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면서 검찰로서도 기존 관행에 안주할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특히 윤금이씨 살해 사건 당시 시민단체들이 결성한 ‘공동대책위원회’가 나중에 ‘주한미군범죄 근절을 위한 운동본부’(공동대표 김찬국 상지대 총장 · 전우섭 목사)라는 상설 기구로 전환하면서 검찰의 주권 행사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된 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그 결과 최근 한 · 미 행정협정사상 유례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지검 김영철 검사(한· 미 행정협정 담당)는 지난해 10월25일 서울 한남빌리지 안에서 ‘세 모녀 감금 · 폭행 사건’을 저지른 미군 헌병 2명에게 소환장을 발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정당한 공무 집행중에 발생한 사건이라 한 · 미 행정협정상 한국 검찰의 소환에 응할 수 없다”고 맞섰다. 윤검사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미군 당국의 공무 수행 주장에 대한 반박의견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매우 이례적인 일선 검찰의 주권 행사 의지는 상급 기관(법무부)에 의해 제지될 처지에 놓여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지검의 한 관계자는 “한 · 미 행정협정이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는 양국 간의 정치 · 외교적 사안이기 때문에 일선 검찰의 손을 떠나 법무부로 넘어갔다”고 밝혔다.

 한국 수사기관이 주한 미군 범죄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소극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같은 사실은 지난 2월26일 밝혀진 경찰청 내부 지시문 내용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경찰청은 이 공문을 통해 ‘미군 관련 사건 · 사고 사실을 일절 외부에 밝히지 말라’고 일선 경찰서와 파출소에 지시해 파문을 일으켰다.

 현재 자기 나라에 주둔한 미군의 범죄에 대해 독일은 연간 52%, 일본은 32%, 필리핀은 21%를 자국이 수사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한국은 0.7~1%에 그치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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