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웃길 수는 없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8.06.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방송 <서세원…>의 ‘장수 퀴즈’/ 시골 노인들의 ‘자연스런 해학’ 압권

사회자 서세원씨가 진땀을 흘리며 답을 유도한다. “그래요, 서울, 서울 하고 구경을 합치면 뭔지요?” 사회자의 안타까움에 아랑곳없이 퀴즈 참가자는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울산!”

 “밖에서 아내 자랑, 자식 자랑하면 무엇이라고 하지요?”
 “지집 자랑하면 미친놈이지.”
 “그것 말고요.”
 “그러면 반미치광이지.”

 서울방송의 <서세원의 좋은 세상 만들기>를 녹화하는 등촌동 스튜디오에서는 일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숱하게 펼쳐진다. 출연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방청객은 물론 사회자도 ‘허리가 꺾이도록’ 웃는다.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 가운데는 ‘방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면서’ 웃는다는 이도 많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도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웃음이다.

 그 웃음을 만드는 주인공들은 ‘현대’ ‘도시’와는 전혀 무관한 촌동네의 70대 노인들이다. 텔레비전에서 토요일 저녁 7시는 청춘 스타들이 총출동해 시청률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황금 시간대, 노인들의 웃음은 이 시간대의 전통을 무너뜨렸다. 지난 3월에 시작해 막 12회를 넘긴 이 프로그램은, 노인들이 만들어내는 웃음만으로 이 황금 시간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장수 퀴즈’ 시청률 35%·점유율 50%넘어
 서울방송 예능 프로그램 가운데서도 시청률이 가장 높고, 같은 시간대 다른 채널도 압도한다. 특히 ‘장수 퀴즈’ 코너가 열릴 즈음이면 시청률 35%에 점유율은 50%가 넘는다. 시청률이 높다는 이유로 황금 시간대를 장악했던 10대 위주 프로그램을 70대 노인들이 단숨에 제압해 버린 것이다. 방송 제작자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의 고정 관념까지도 깨뜨린 놀라운 힘이 아닐 수 없다. <서세원의…>도 시청률을 걱정한 나머지 ‘스타 캅스’라는 코너를 설치하고 송승헌·임창정·유승준 같은 청춘 스타를 전진 배치했지만, 이 코너는 6월부터 사라진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노인들을 소외하고 있지만, 방송에서의 소외는 그보다 훨씬 더 심했다. 특히 황금 시간대에는 20~30대마저도 밀려날 판이니 노인들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방송에 노인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프로그램은 새벽 시간 같은 시청 사각 지대에 배치되었고, 조금 튀기라도 하면 곱지 않은 평이 따라붙었다. ‘칙칙하다.’ ‘노인들이 주책 떤다.’

 <서세원의…>가 이전의 노인 프로그램과 크게 다른 점은 그 내용이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라는 점이다. 70년대 동양방송의 <장수 만세>를 비롯해 그 뒤를 이었던 대부분의 노인 프로그램은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면서도 철저하게 연출된 작품이었다. 노인들의 처지가 아니라. ‘노인들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젊은 연출자들의 고정 관념이 만든 프로그램에서는 그야말로 ‘칙칙한 웃음’밖에 발견할 수 없었다. 노인을 무시하는 연출된 방송이 그들 특유의 정서와 어법을 모두 거세해 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서세원의…>는 노인들의 풍성한 말들, 도시나 현대성에 오염되지 않은 원시적 어법을 있는 그대로 살려 놓는다. 젊은이나 도시 사람들의 입을 통하면 심한 욕이 될 법한 말들도 시골 노인네들이 하면 욕이 아니라 해학으로 변한다. “썩을 인간이 또 술을 처먹었구나.” 지역 특산물이라며 들고 온 토종 돼지가 녹화 현장에서 돌아다니는가하면, 출연자들은 방송 자체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노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방송을 끊임 없이 의식하는 사회자나 젊은 방청객 들과 대비되어 시청자로 하여금 더 큰 웃음을 짓게 한다.

 “프로그램을 이렇게 쉽게 만든 적이 없었다. 촬영 현장에 나가면 다 나오게 되어 있으니 다른 오락 프로그램처럼 아이디어를 짜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다.”<서세원의…>를 제작하는 이상훈 PD는 스스로도 한국 노인들에게 이런 웃음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골가운데서도 두메만을 골라 찾아다니는 이PD가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이 있다. 웃음 뒤에 숨어 있는 노인들의 외로움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가진 돈다 털어 자식들을 공부시킨 ‘진정한 산업 역군’들이, 산업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하고 심지어는 버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웃음 뒤에 밴 눈물
 노인들이 만드는 웃음을 잘 뜯어보면 그 뒤에는 언제나 눈물이 배어 있다.“요새 젊은애들은 노인들 더럽다고 가까이 오려고도 하지 않아, 늙으면 빨리 죽어야 해.” 노인 된 서러움과 외로움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말들도 더러 있지만, 웃음 뒤편에 눈물을 감춘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향에서 온 편지’ 코너를 보면서 도시에 사는 자식들은 눈물을 펑펑 쏟는다. 시청자들은 영상 편지를 보내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고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결국에는 코 끝이 찡해진다. 피상적이고 감각적인 웃음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지니고 있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 고향에 대한 애듯한 향수를 자극하는 웃음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두메의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10년 넘게 <강원도 아라리>를 채록해 온 전신재 교수(한림대·국문학)는 노인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을 이렇게 해석한다.“노인들의 말에는 우리 전통 문학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골계(滑稽)가 있다. 골계는 우리 채질에 들어있는 요소이다. 노인들의 꾸밈없는 웃음과 말속에는 항상 눈물이 숨어 있다. 눈물을 감춘 웃음, 그것은 우리 전통 문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겉으로 웃게 하면서 속으로 울게 만드는 전통 문학의 특징을 노인들의 어법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상훈 PD는 ‘장수 퀴즈’를 녹화하기 전에 출연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말씀하실 때 편안하게 큰 소리로 하세요. 옆 분이 잘못하면 꾸짖어도 괜찮아요. 그냥 있는 대로 하시면 돼요.” 인위적인 연출을 가능한 한 피하고 노인 편에 서서 프로그램을 풀어 가려 하지만, 어색한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방청객·사회자·시청자가 모두 아는 ‘무스’ ‘비키니’ ‘베꼽티’ 같은 질문을 던지고, 촌 노인네들이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을 때 노인을 희롱한다느니, 상품화한다느니 하는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들은 그 같은 점에 대해서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사회와 자식으로부터 소외받는 그들이 방송에 출연해 당신들 마음대로 놀 수 있는 판, 젊은 사람들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웃고 떠들 마당을 마련해 준 것에 그저 감사하고 고마워한다. 프로그램이 끝날 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산업화 이후 젊음과 새로움과 서양의 가치만을 숭배해 온 한국 사회를 향한 꾸지람인지도 모른다. “선물 타러 나온 게 아닙니다. 여기 와서 한 시간동안 잘 놀았습니다. 늙은이를 축복해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PD에 따르면, 출연한 모든 노인들은 출연료 20만원을 끝까지 사양한다.
成宇濟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