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 뻗은 한국 과학, 대륙으로 나아가자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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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조지 섬 세종기지로는 연구 한계 … 제2기지 건설해야

지도책을 펼쳐놓고 남극 대륙을 더음어 보자. 남아메리카의 끝에서 바다를 건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남극 대륙으로부터 가오리 꼬리처럼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땅덩어리가 눈에 들어온다. 남극 반도이다. 반도를 따라 왼편으로 크고 작은 섬 20여개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1819년 처음으로 문명 세계에 그 존재를 드러낸 사우스세틀랜드 제도이다.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꼽히는 킹조지 섬 한구석에는 매년 11월 말-12월 초 한국인 과학자들 사이에 조촐한 이별과 상봉의 자리가 마련된다. 세종기지에서 겨울을 나며 새로 활동을 시작할 일단의 과학자들이 거센 눈보라,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고독한 겨울 한철을 보낸 또 다른 과학자들과 임무를교대하는 것이다.

 이별과 상봉의 의식이 벌어지는 날은 ‘11월 말-12월 초의 어느 때’로 정확하게 지정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통 킹조지 섬으로 들어가는 한국의 과학자들은 남아케리카 대륙 최남단 항구 도시 푼타아레나스(칠레)로 날아간다. 거기서 다시 칠레 군용기나 다른 나라 배를 빌려 킹조지섬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남극해의 거친 파도와 세찬 바람, 변덕스러운 날씨가 이들의 ‘안정된 출발’을 기약해 주지 않는 것이다. 남아메리카 대륙과 남극 반도 ‘가오리 꼬리’ 사이의 거리는 대략 1200km. 더욱이 두 지점 사이에는 험하기로 세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드레이크 해협이 가로 놓여 있다.

남극은 거대한 ‘자연 실험실’
 새로 도착한 월동대는 전임 월동대로부터 연구 업무 외에 기지 유지 임두도 인수한다. 따라서 월동대에는 지질학자 · 해양생물학자 · 기상학자를 비롯한 연구진말고도 정부 각 부처에서 파견된 요원과 전기 · 기계 · 설비 · 조리 부문에서 공채한 기술진이 포함된다. 월동대를 구성하는 인원은 한 해 15명 안팎. 월동대의 활동은 88년2월17일 국내 건설 · 기술진에 의해 건설된 세종기지가 낙성식을 가지면서 처음 파견된 이래 올해까지 벌써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오는 연말에 세종기지에 파견되어 임무를 교대할 13차 월동대는 현재 강원도 열월 등지를 돌며 극지 적응 훈련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극 대륙은 도전 · 탐험과 동의어로 인식되어 왔다. 아문센이나 스콧 이래 남극 대륙은 등반가들이 ‘산이 거기 있어서’ 산에 올랐듯이, 탐험가들에게 늘 ‘거기 있어서 찾아가는’ 미지의 땅이었으며 도전의 대상이었다. 오늘날에도 이같은 상황은 큰 변함이 없어, 목숨을 건 탐험이 수시로, 그리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68-69쪽 상자 기사 참조).

 그러나 정확히 57-58년을 기점으로, 남극 대륙의 진정한 주인은 탐험가로부터 과학자로 바뀌었다. 바로 이 해 남극과 인연을 맺고 있던 전세계 열두 나라의 과학자 5천여명이 남극과 아(亞)남극에 임시로 60여개의 기지를 짓고, 아직 정체가 소상히 알려지지 않은 남극에 대해 대규모 탐사작업을 벌이기시작했던 것이다. 이른바 ‘국제지구물리관측연도(IGY)라고 지정된 이 시기에 과학자들의 활동은 △남극 지역을 평화 목적으로 이용하고 △남극지역에서의 과학적 조사에 대해 협력을 보장하려는 국제 노력으로 이어져 61년 마침내 ’남극조약‘이 체결되었다. 남극 대륙에 이른바 ’탐험 시대‘가 가고 ’탐구 시대‘가 열린 것이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과학자들은 남극 대륙에서 적지 않은 과학적 성과를 일구어냈다.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오존층 파괴 현상’과 ‘지구 온난화 현상’의 심각성을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확인해 국제 사회에 경고하고 대책을 세우게끔 한 것이 대표적이다. 오존층 파괴 현상의 주범은 익히 알려진 대로 냉매제 등으로 널리 쓰이는 염화불화탄수(CFCs)이다. 금세기 초 실용화할 당시 일부 화학자들은 이 물질이 유해성을 ‘백년이 지나도 기껏해야 대기중 오존의 2%정도가 파괴될 것이다’라고 과소 평가했다. 그러나 염화불화탄소는 남극의 과학자들에 의해 매년 9월게 이 물질로 인해 남극 상공의 오존층이 엄청나게 큰 구멍이 뚫린다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사용 금지가 논의되는 등 국제적인 논란거리로 떠오르게 되었다.

극에서의 과학적 조사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일찍이 70년대 말 미국의 대기 과학자 J. H 머서는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 효과가 남극의 얼음을 녹일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남극 얼음에 대한 지속적인 관측 · 감시를 제안했다. 그런데 마침 90년대에 들어와 영국남극연구소 등 전문 기관에 의해 남극 대륙 일부 지역의 빙붕(얕은 바다를덮고 있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이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관찰됨으로써 이같은 머서의 경고가 사실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현상을 세종기지의 한국 과학자들도 조사해 지난해 국내 학계에 정식 보고했다.

 남극 지역이 과학자에게 그 자체로 연구의 대상이자 ‘자연 실험실’이 되고 있는 요인은 여러 가지이다. 곳에 따라 연푱균 기온이 섭씨 영하 55˚를 밑도는 살인적인 추위, 평균 두께가 2.160m로 한라산 높이(1,960m)보다 더 두껍게 대륙을 덮고 있는 만년빙, 그러면서도 뜨거운 수증기와 연기를 내뿜는 온천과 활화산, 2백만 년 동안 비가 온 적이 없어 사막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드라이 밸리’, 곳에 따라 몇 달씩 낮 또는 밤만 계속되는 특수한 기상 상황 등 여러 가지 자연 조건과 특성이 남극 지역을 ‘살아 있는, 거대한 실험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얼음층에 지구 탄생 · 성장 비밀 담겨
 특히 오랜 세월에 걸쳐 남극 지역에 내린 눈이 차곡차곡 쌓여 형성된 얼음은 지구 탄생과 성장의 비밀을 밝힐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어 각 기지에 진출한 과학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단골 연구품목’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연구 성과가 러시아 보스토크 기지에서 이루어진 얼음 분석이다.

 한국해양연구소 책임 연구원으로서 3차에 걸쳐 세종기지 월동대장을 맡았던 장순근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보스토크 기지는 남극에서 벌어진 미 · 소 자존심 대결의 산물이다. 미국이 50년대 말 남극점에 아문센 · 스콧 기지를 세워 성조기를 꽂자 당시 경쟁 관계이던 옛 소련이 이에 지렛라 남극 대륙에서 가장 험난한 지역을 골라 연구 기지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보스토크 기지이다.

 여기서 러시아 과학자들은 얼음 연구를 진행하면서 무려 3.700m가 넘는 깊이까지 얼음을 뚫었다. 눈이 쌓일 때 눈 입자 사이 빈틈으로 공기가 들어차는데, 이 눈이 얼음이 되면 그 틈에 들었던 공기는 공기 방울을 만든다. 러시아 학자들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해 얼음 속의 공기 성분을 분석하고자 했던 것이다. 공기 성분을 분석해 러시아 과학자들은 42만년 전부터 지금까지 지구상에 네 번에 걸친 기후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장순근 박사가 최근 펴낸 자신의 저서 <야! 가자 남극으로>(창작과비평사)를 통해 소개한 또 하나의 흥미 있는 얼음 연구로는, 우주 생성 때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뮤중간자와 중성미자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다. 이는 최근 미국 과학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데, 이들은 이미 남극점에 중성미자를 찾으려는 탐사 장치까지 설치했다. 뮤중간자는 중간자가 붕괴할 때 중성미자와 함께 생기는 소립자이다. 미국 과학자들은 아직 지구에서 발견되지 않은 이들 소립자를 발견해 우주 생성의 비밀을 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종기지, 대기과학 연구에 특별한 역할
 이 밖에도 깨끗한 대기 · 가혹한 기후 등 남극특유의 자연 환경을 이용한 응용 과학 실험도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예외적인 조거에서의 물질 특성 연구를 들 수 있다. 섭씨 영하 50˚ 이하로 내려갈 정도의 강추위에서도 양털 ˚ 면화 등 자연산 섬유는 고유 성질을 잃지 않지만 인조 옷감은 성질이 변한다. 또 이같은 추위에서는 알미늄 등 일부 금속은 변형된다. 과학자들은 바로 이같은 조건을 이용해 섬유가 추위에 견디는 정도를 실험하거나, 남극의 공기 속에서 금속이 얼마만큼 녹스는가 따위를 연구해 실생활이나 산업 생산에 응용하는 것이다.

 한국이 남극 연구 대열에 합류한 때는 88년이다. 85년 한국해양소년단연맹에 의한 남극 대륙 최고봉 빈슨 매시프(4,897m)등정과 킹조지 섬 캄사에 이어 86년 11월 남극조약에 세게에서 서른세 번째로 가입한 이후, 적극적인 남극 진출 노력을 기울여 킹조지 섬에 세종기지라는 교두보를 세웠던 것이다. 이후 한국은 지금까지 모두 12차에 걸쳐 월동대를 보냈고(현재 활동중). 크고 작은 여름철 연구대를 보내며 남극 연구에 열성을 기울였다.

 현재까지 총 연인원 5백명 가까이 투입되면 한국해양연구소를 중심으로 진행된 연구 활동은 크게 네 분야를 축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 첫째가 남극 반도 북부 지역의 지질 및 지체구조를 연구하는 지질 과학 분야. 한국 세종기지팀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킹조지 섬 지역을 덮고 있는 빙하가 1만7천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현재 상태로 형성되었다는 사실 등을 밝혔다.

 대기과학 분야에서 세종기지는 특별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세종기지는 남극 지역에서 지리적으로 고위도에 있지만 지자기적으로는 중위도로 분류되는 곳에 있다. 이처럼 지리적인 극점과 지자기 극점이 일치하지 않는 곳에서는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더 복잡 · 다양한 대기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세종기지 주변에 고층 대기물리 연구를 수행하는 기지가 없어 이 연구를 진행하는 세종기지가 전략적으로 중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한국해양연구소측의 설명이다. 세종기지측은 지난해 1월 첨단 오존층 관측 장치를 새로 설치해 대기과학 연구 기반을 한층 더 다졌다.

 생물학과 빙하 연구도 세종기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구분야이다. 현재까지 이 지역에서의 생물학적 연구는 크릴을 중심으로 한 해양 생태계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세종기지측은 혹독한 자연 환경에서 생육하는 해조류 · 해면 및 강장동물 같은 저서 생물로부터 천연물 성분을 추출해 이를 합성하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빙하 연구는 남극을 연구하는 과학자 사이에서 일찌감치 주목되어 온 분야로서, 한국에서도 최근 본격적으로 빙하를 연구한 전문가 홍성민 박사를 투입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쇄빙선 건조 · 전담 기구 설립 절실”
 세종기지를 다녀온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모아 매년 한 차례 한국해양연구소 명의로 보고서를 펴낸다. 당해 연도 남극 연구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다음 단계 연구의 참고 자료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세종기지 지질연구팀은 수년간 조사한 끝에 기지 주변 지역의 지질 상황을 종합한 지질도를 완성해 내년 초에 내놓을 예정이다. 그러나 10여 년에 걸친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근 남극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은 과학자 사이에서는 ‘남극 연구가 점점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남극 연구가 ‘유년기’를 지난 만큼 앞으로는 좀더 과감하고 적극적인 ‘본토 진출’을 꾀해야 할 단계라는 것이다.

 이같은 초조감은국내 과학자들의 연구 행동 반경이 10년째 세종기지라는 울타리 바깥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 섬은 남위 61°50′-62°15′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점은 엄격히 말해 ‘남극권’에도 들지 못한다. 학계에서 보통 남극은 남위 60°이남 지역을 말하기 때문이다.

 세종기지의 지리적 위치는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과 영역에 막대한 제약을 가져다 준다. 남극 지역은 기후와 지형 특성상 한겨울에는 장거리 이동은커녕 불과 수km거리도 움직이기 어렵다. 남극대륙과 접한 바다에는 늘 얼음덩어리가 떠다니고 있어 한여름에도 쇄빙선 없이는 돌아다니기 힘들다. 따라서 세종기지 과학자들은 겨울철에는 물론 한여름에도 인접 지역 또는 대륙 본토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이같은 행동 반경 제약이 곧 연구 아이템 제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부 과학자 사이에서 남극 대륙에 ‘제2의 과학기지를 건설하고 쇄빙선을 건조하는 외에, 남극 연구를 전담할 기구를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남극 대륙에 교두보를 설치 한지 11년 만에 한국의 남극 연구는 중대 갈림길에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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