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실학 분리 茶山學 새 지평 열다
  • 이문재 기자 ()
  • 승인 2006.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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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시각과 다른 논문.저서 잇따라

 다산학 연구가 새로운 차원을 맞고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사상은 인간론에서 시작해 우주론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이다. 그러나 사학.문학.철학 등 인문학 분야와 사회과학계 일부에서 접근해온 그간의 다산학은 ‘조선조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쪽으로만 집중돼 오히려 다산 사상의 진면목을 가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평생을 다산 연구로 일관해온 원로 학자 이을호씨(83.다산학연구원장)가 최근 내놓은 <다산주역>(민음사)을 비롯, 소장학자 한형조씨(35.한국사상연구소)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논문 <주희에서 정약용에로의 철학적 사유의 전환> 그리고 배병삼씨(34.경희대 강사)의 경희대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학위 논문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가 비슷한 시기에 발표됐다.

다산 사상의 방대한 광맥, 새 각도서 탐사

 이 연구서와 논문 들은 다산과 실학과의 관계망 대신에 각각 다산과 주역, 다산과 理氣論,다산과 정치사상 등 사상의 방대한 광맥을 다른 각도에서 탐사하려 한 것이다.

 다산을 실학자로서 조명할 때 학자들은 다산의 ‘1표2서’(<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심서>)와 같은 경세서에 많은 눈길을 주지만, 이번에 나온 연구들은 다산과 經學(주자.공맹)의 ‘회귄적’관련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다산 역학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다산역학>에서 이을호씨는 역학에 대한 다산의 입장을 밝힌다. 다산은 “易道란 본시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한 자(尺)라기보다는 오히려 개과천선,純愛天命을 위한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다산은 신비주의적 역학관을 극구 배격하면서 역학이 갖고 있는 실사구시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다산의 역학은 생활철학이요 윤리인 것이다.

 다산의 이같은 노력은 중국이 漢.宋.明을 거치면서 미신으로 전락한 역의 본질을 되찾고자 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따라서 다산의 역학은 중국 역학의 출발점부터 시작해 근세에 이르기까지 역학의 변천과정에 각 단계마다의 오류를 자신이 연리론(易理四法)에 근거해 비판적으로 재구성, 집대성한 것이다. 이씨는 “이원론을 극보가기 위한 다산의 사상체계가 완벽한 원리인 ‘한’사상과 맥이 통한다”면서 “단군 화랑의 원효(佛) 다산으로 이어지는 ‘한’사상의 맥락은 인류사상사에서도 일대 장관을 이룬다”라고 다산 역학의 사상사적 의미를 높이 산다.

 한형조싸의 <주희에서 정약용...>은 조선조 후기,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대표적 세계관인 理氣論的 성리학을 다산이 어떻게, 왜 전면적으로 비판했는가를 논구한다. 다산이 보기에, 조선조 성리학 철학이 뒤흔들린 이유는 ‘자연과 인간을 연속적으로 이해하는 주희의 포괄적 발상’ 때문이었다고 이 논문은 분석한다. 다산은 주희의 위와 같은 우주론을 해체한다.

 주희는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성과 변화를 理와 氣의 만남으로 규정했다. 자연과 인간은 모두 氣로써 이루어지고 이 기를 이끄는 패턴이 理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자연계와 인간을 분리했다. 논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연계에서 볼 수 없는 도덕감(모럴 센스)이 있다. 주희의 체계에서 보면 인간의 동물적인 공격성과 이타적인 휴머니티가 구별되지 않는다.

 다산이 주희를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은 이기이원론(퇴계) 이기일원론(율곡) 등 조선철학사에서 인간론의 난점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산이 주희의 우주론을 해체할 때 사용한 방법은 洙泗學(공맹 시대의 유교, 원시 유교)으로 돌아감이었다.<맹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다산은 인간의 정신적 자아은 궁극적으로 어떤 물질적 제약도 초월하는 성격을 지닌다고 보았다. 이 초월적 지각이 인간성의 선함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사회적 지향도 이념이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인간 본성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진보의 정점에 있는 다산이 원시경전으로 휘귀한 대목에서 다산을 실학의 관점에서 연구한 학자들은 곤혹해 한다”라고 한형조씨는 지적한다. “지금까지의 다산 연구가 실학에만 편중해 상대적으로 성리학은 소외되었고, 그 결과 조선조 자체가 폄하되기에 이르렀다”고 그는 말한다. 성리학과 실학과의 단절에 유념했던 그간의 연구에 견주어 한씨의 이번 연구는 실학을 성리학의 연장선 위에 놓은 최초의 논문이다.

 배병삼씨의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은 다산의 학문적 지향점이 수사학(원시 유교)에 있다고 전제한다. 그는 이어서 다산이 수립하고자 했던 정치사상의 실체는 “왕권과 미권의 대립, 또는 그 둘의 선택으로 파악할 것이 아니라 修己治人의 구도 속에서 살필 때 다산 정치사상의 복합성이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정치사상 전공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발표된 다산 정치사상 연구서이다.<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 역시 한형조씨의 문제인식처럼 다산을 실학으로부터 가능한 한 분리하려 한다. 다산이 실학을 집대성한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배병삼씨는 “실학 때문에 국가 형태를 모색하는 국가경영자로서의 다산이 사장되는 지적 풍토가 안타까웠다”라고 말했다.

 당대의 성리학을 바로잡고자 했던 다산은 수사학(원시 유교)으로 돌아가지만 이것은 단순한 ‘희귀’가 아니라 ‘되돌아나옴’이었다. 이 논문은 “다산 사상의 핵심,즉 현실을 따지는 기준은 古經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획득되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유교적 세계관의 문제 해결 능력과 그 보편성을 확신했던 다산은, 조선조 후기의 위기가 유교적 세계관에 대한 오해(이념적 차원)와 운용상의 과오(정책적 차원)에서 비롯했다고 판단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유교적 세계관의 본질을 되살리고자 한 것이다.

 다산의 정치사상은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적 지침과 왕도정치의 통시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인 ‘수기치인’으로 압축된다.수기치인이란 수기한 사람이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지만, 다산은 수기라는 사적 윤리가 곧 공적 정치 윤리를 실현할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시한다. 이 논문에 따르면, 다산은 상제(하늘)에 대한 믿음(誠),관료관찰제, 백성들에 의한 간접선거제 등 군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상호 긴장하는 기제(메커니즘)를 제도화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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