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 미친 ‘다시 보기 세대’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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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로 보고 또 보며 분석·패러디…주력 부대는 20, 30대
 
드라마 마니아인 이원국씨(가명·27)에게 텔레비전은 가구이다. 자취를 하는 이씨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텔레비전을 켜지만 적극적으로 시청을 하지는 않는다. 그냥 틀어놓을 뿐이다. 보고 싶은 드라마는 컴퓨터로 ‘다시 본다’. 최근에는 토요일, 일요일에 <연애시대> 16부작을 한꺼번에 몰아서 보았다. ‘드라마 폐인’들이 하도 작품이 좋다고 해서다. ‘닥본사 운동’(‘닥치고 본방송 사수’를 줄인 말·드라마를 제 시간에 텔레비전으로 보자는 인터넷 은어)을 하자는 네티즌도 있지만 그는 컴퓨터로 드라마를 본다. 왜? “귀가 시간을 드라마 방영 시간에 맞추기도 어렵다. 화질도 중요한 이유다. HD 드라마는 다운받아서 보면 텔레비전으로 볼 때보다 고화질의 느낌이 든다. 컴퓨터로 보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이씨처럼 요즘 젊은 세대는 드라마를 컴퓨터로 다시 보고 또 다시 본다. 이른바 ‘다시 보기’ 세대이다. 이들의 근거지는 드라마 ‘공홈(공식 홈페이지의 줄인 말)’. 그리고 디시인사이드 드라마 갤러리, 마이클럽, 다음 텔레비존 등 인터넷 게시판에서 드라마를 물고 뜯고 씹고 분석한다. ‘필이 꽂힌’ 드라마 장면은 ‘짤방’으로 만들어 유통시킨다(디시인사이드 드라마 갤러리는 드라마 사진을 올리지 않으면 글을 올릴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올리는 드라마 사진을 ‘짤림 방지용’이라고 부른다. 이 드라마 사진을 줄여서 ‘짤방’이라고 한다).

시청 양상, 일반 시청자와 판이

방송 프로그램을 다시 보는 주력 부대는 20대와 30대이다. 디지털 콘텐츠 유통 전문 사이트 콘피아닷컴의 회원 연령별 점유율을 보면 20대와 30대가 65%를 점유하고 있다(10대 13%, 20대 40%, 30대 25%, 40대 16%, 기타 6%). 성별로 보면 남성이 49%, 여성이 51%를 차지한다. 비율은 비슷하지만 통상적으로 여성이 텔레비전 핵심 시청자층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텔레비전 앞에서는 소극적인 남성들이 모니터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다시 보기에 나서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보기 세대는 다른 프로그램보다 드라마 충성도가 높은 편이다. 텔레비전 시청률과 다시 보기 서비스(VOD)에 관한 석사 논문을 쓴 바 있는 임문영 iMBC 웹기획부장은 “다시 보기 서비스를 카테고리별로 분석하면 드라마가 59%, 연예·오락 33%, 시사·교양 5% 정도를 차지한다. 연령별로 보면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 핵심이다. 여기에 20대 초반이 가세하면 대박이 터진다”라고 말했다.

콘피아닷컴의 분석에 따르면, 다시 보기 서비스를 주로 이용하는 시간대는 오후 1시에서 5시 사이, 그리고 밤 10시 이후이다. 인터넷을 많이 쓰는 시간대와 주요 드라마가 끝난 시간에 웹에 접속해 드라마를 다시 보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토요일, 일요일에 다시 보기를 찾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통상 토요일과 일요일은 인터넷 접속량이 뚝 떨어지는 경향과 사뭇 다르다. 시간이 날 때 여유 있게 드라마를 몰아서 본다.

다시 보기 세대는 일반 시청자와 판이한 시청 양상을 보인다. 시청률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다시 보기 시청률이 높은 것은 아니다. 지난 6월26일부터 7월2일까지 한 주간 시청률 순위와 다시 보기 서비스 순위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한눈에 드러난다. MBC의 경우 시청률에서는 고전을 하고 있는 <불꽃놀이> <진짜 진짜 좋아해> <레인보우 로망스> <소울 메이트>가 다시 보기 서비스에서는 상위권으로 올라왔다. SBS는 <연애시대> <야인시대> <파리의 연인> <건빵선생과 별사탕> <발리에서 생긴 일> 등이 다시 보기 순위에 이름을 내밀고 있다. <파리의 연인>은 방영 당시  다시 보기 서비스 매출이 10억원을 넘었다. 김근웅 KBSI 인터넷사업2팀 파트장은 “예를 들어 <장밋빛 인생>의 경우는 시청률이 40%대를 육박했는데 다시 보기 서비스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20대, 30대 여성 고객이 주고객인데 이들이 트렌드성 드라마, 톱스타 주연 드라마, 스토리텔링이 강한 드라마를 좋아해 이런 드라마들이 다시 보기에서 강세를 보인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예로 <낭랑 18세> <풀하우스>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을 들었다.

 
<낭랑 18세> <다모> 등은 다시 보기계의 걸작

시청률보다는 경쟁사 편성이 다시 보기 서비스에 영향을 미친다. 동시간대에 인기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으면 일단 텔레비전으로 그것을 보고, 그보다는 인기가 떨어지는 프로그램을 컴퓨터로 보는 것이다. 다시 보기계의 걸작인 <낭랑 18세>나 <부활>이 대표적이다. 김근웅 파트장은 “두 프로그램은 방송 당시 <대장금> <내 이름은 김삼순>과 맞붙어 불운했는데, 다시 보기에서 마니아가 형성되면서 VOD 인기가 상당했다”라고 말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타사의 동시간대 인기 드라마가 뜨기를 바라기도 한다. 타사 시청률이 올라가면 우리 회사의 다시 보기 매출이 상승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참여’와 ‘선택’은 다시 보기 세대의 중요한 특성이다. 이들은 드라마 ‘한 놈만 골라’ 패러디하고 분석한다. 그래서 다시 보기 서비스 순위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진원지 중 하나로 게시판이 떠올랐다. 게시판의 게시물 수와 다시 보기 순위는 거의 비례한다. <부활> <다모> 등 다시 보기계의 걸작들은 방송 당시 게시판에 열혈 마니아의 응원과 패러디물이 넘쳐났었다. <다모>는 게시물 수가 1백50만 건을 돌파하기도 했다. 네티즌 사이에 드라마의 명장면 등이 화제가 되면 그 드라마는 어김없이 다시 보기계에 떠올랐다. ‘저주받은 걸작’ <신돈>은 주인공 손창민의 웃는 장면이 ‘짤방’으로 제작되어 드라마 마니아들을 모니터 앞으로 끌어냈다.

재방송 여부도 다시 보기 순위에 영향을 준다. 공유와 공효진이 주연했던 <건빵 선생과 별사탕>이 ‘난데없이’ SBS 자체 순위권에 들어온 것은 최근 케이블 방송에서 이 드라마를 재방송했던 영향이 크다.

드라마를 컴퓨터로 보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다시 보기뿐만 아니라 ‘주장미’ 문화까지도 생겨나고 있다(주장미는 주요 장면 미리 보기 서비스를 줄인 인터넷 은어). 드라마 <궁>은 3백원짜리 ‘주장미’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마니아 이원국씨는 “궁금증을 해소하는 측면도 있지만 드라마를 가장 완결성 높게 하이라이트로 보는 느낌이 강하다”라고 말했다. 임문영 iMBC 웹기획부장은 “주장미를 본 사람들이 드라마 게시판에서 여론 선도자 역할을 한다. 다시 보기뿐만 아니라 주요 장면 미리 보기를 강화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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