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19년 전쟁’ 끝났다
  • 신기주(프리미어 코리아 기자) ()
  • 승인 2006.12.0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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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배사 UIP 해체, CJ엔터테인먼트가 ‘외화’ 직접 배급

 
1988년 UIP 직배 파동은 가뜩이나 열악한 한국 영화계의 숨통을 죄는 일대 사건이었다. 1970년대 유신 체제가 시작된 이후 한국 영화는 잔인한 검열 등으로 어두운 중세 시대를 거쳐야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텔레비전의 보급은 한국 영화를 고사 직전까지 몰고 갔다. 5공화국 시절, 한국 영화는 이장호와 배창호 같은 새로운 감독들의 활약으로 잠시 활기를 되찾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정부의 검열은 계속됐다. 한국 영화는 여전히 변두리 영화라는 뜻으로 ‘방화’라고 불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 시장이 개방될 것이라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그해 1월 문을 연 UIP 직배사 서울사무소는 한국 영화계에는 점령군이나 다름없었다. 영화인들은 극렬한 직배 반대 투쟁을 벌였다. 살려달라는 호소였다. 소용없었다. 영화인들은 UIP 직배 영화가 상영되고 있던 서울 종로 단성사 극장에다 뱀을 풀었다. 영화인들은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2007년 1월, UIP가 해체된다. 정확하게 19년 만이다. UIP는 유나이티드 인터내셔널 픽처스(United International Pictures)의 약자다. 할리우드 메이저인 파라마운트와 유니버설의 한국 합작 법인이다. 두 회사가 만든 영화들의 한국 시장 배급을 관장한다. 2007년 1월이 되면 UIP에서 파라마운트가 떨어져 나온다. 파라마운트는 UIP를 통해 2005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을, 2006년에는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3>를 한국 시장에 배급했다. 그런데 앞으로는 파라마운트 영화의 한국 시장 배급을 국내 메이저인 CJ엔터테인먼트가 맡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우선 할리우드 안에서의 정세 변화 때문이다. CJ엔터테인먼트는 10년 전 스필버그가 설립한 영화사 드림웍스에 투자했다. 지금까지도 CJ엔터테인먼트는 드림웍스의 지분 5%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시장에서 드림웍스 영화의 배급권을 가지고 있다. 드림웍스는 초창기만 해도 <슈렉>도 만들고 <아메리칸 뷰티>도 만들고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덩지가 작은 회사가 메이저들 틈바구니에서 오래 버티기는 어렵다. 스필버그가 2006년 1월 드림웍스를 파라마운트에 팔아치웠다. 톰 크루즈가 파라마운트와 결별하면서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어쨌든 큰 그림으로만 보면 <슈렉>과 <미션 임파서블>이 만난 셈이다.

UIP는 사라졌다. 19년 전 UIP는 할리우드의 조선총독부 같은 상징적 존재였다. UIP의 뒤를 이어 월트디즈니·20세기폭스·소니 컬럼비아 같은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속속 한국에 진출했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영화 시장은 이런 할리우드 직배사들의 놀이터였다. 1988년 한 해 동안 만들어진 한국 영화는 87편이었다. 직배사들이 개봉시킨 할리우드 영화들은 1백75편에 달했다.

할리우드 직배사들의 ‘철수’ 계속될 듯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1백80° 달라졌다. 지금 할리우드 직배사들은 대부분 국내 시장에서 한때 철수를 고려했거나 사업을 축소하고 있다. 2006년 10월 현재 할리우드 영화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25% 안팎이다. 한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은 60%를 넘었고, 이런 한국 영화의 독주는 벌써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의 텃밭이라고 여겨졌던 여름 시장에서마저도 할리우드 직배사들은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다. 사실 한국 영화 제작자들에게 여름 시장 공략은 필생의 과제 같은 것이었다. 가장 많은 관객이 몰리는 시장이면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 때문에 엄두를 못 내던 금단의 땅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괴물>이 여름 시장을 싹쓸이해버렸다. <괴물>의 제작자인 최용배 청어람 대표는 이런 말을 한다. “<괴물>이 자랑스러운 점을 꼽으라면 여러 가지가 있다. 대중은 무관심할지 몰라도 한국 영화 제작자로서 <괴물>이 자랑스러운 건 <괴물>이 여름 시장에서 성공한 한국영화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름 시장에서 흥행한 한국 영화는 <엽기적인 그녀>나 <웰컴 투 동막골> 정도였다.

지난 십수년 동안 한국 영화계는 할리우드 직배사라는 점령군에 대항해 치열한 독립 전쟁을 벌여왔다. 어쩌면 올해 여름 시장은 20년 전쟁의 전세를 좌우할 분수령이었다. <괴물>은 1천3백만명을 끌어모았다.

할리우드 직배사들의 철군은 계속되고 있다. 일단 DVD 배급 사업부터 축소하고 있다. 국내 DVD 시장이 열악한 탓도 있다. 하지만 사업 부문을 축소하지 않으면 국내 시장에서 늘어나는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이유다. 우선 20세기 폭스가 국내 DVD 배급을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소니픽처스와 디즈니의 국내 배급 법인인 브에나비스타는 국내 극장 배급을 공동으로 하기로 했다. <스파이더맨3>나 <007 시리즈>가 한 회사를 통해 개봉한다는 얘기다. 영화 한 편을 개봉하려면 홍보 비용부터 프린트 제작 비용까지 수억원대의 돈이 들어간다. 그 돈을 아껴보자는 것이 골자다.

국내 메이저들, 할리우드 영화까지 쥐락펴락

 
1990년대 후반 한국 영화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직배사들의 위기감은 싹트기 시작했다. 적은 돈으로 많은 돈을 벌어서 미국으로 보내던 할리우드 직배사들의 땅 짚고 헤엄치기 식 사업이 한계를 보였던 탓이다. 흥행을 하기위해서는 할리우드 직배사들도 한국 영화 제작사들 못지않게 홍보에 공을 들여야 했다. 그나마도 한계에 부딪치자, 여러 가지 자구책이 나왔다. 디즈니는 토착화 전략을 들고 나온 적도 있었다. 한국 영화를 디즈니가 투자하고 제작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유럽권 몇몇 나라에서는 디즈니가 투자하거나 제작한 유럽 영화들이 만들어진 터였다. 투자가 진행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실효성이 적었다. 너무 위험했다. 미국 본사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 시장은 작았다. 안정된 일본 시장이 있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국내 메이저들의 힘은 날이 갈수록 막강해져갔다. 오히려 직배사들은 국내 메이저들에게 이용 가치가 있는 제물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공격적 구상을 한 쪽은 시네마서비스였다. 배급 물량을 맞추고 안정적 수익성을 확보하려면 흥행성 있는 외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좋은 할리우드 영화는 직배사들이 쥐고 있었다. 시네마서비스는 아예 이참에 직배사 하나를 인수할 전략을 세웠다. 당시 시네마서비스의 지휘권은 20세기폭스의 사장을 지냈던 김정상 대표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일렀다. 시네마서비스의 구상은 계획으로만 그쳤다.

결국 그 큰 그림이 CJ엔터테인먼트의 손에 의해 현실화된 셈이다. UIP의 해체는 미국 내 정세 변화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국 CJ엔터테인먼트가 드림웍스의 지분을 미리 확보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배사가 해체되고 국내 메이저가 할리우드 영화들까지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직배사에서 토착 영화사들로의 영화 권력 이동이 마무리되는 상징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쇼박스나 롯데처럼 풍부한 자본을 지닌 국내 메이저들 역시 CJ엔터테인먼트와 비슷한 전략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 직배사들이 한국 시장에서는 국내 메이저와 함께 가는 게 좋다고 판단한 이상, 새로운 이합집산의 가능성은 여전하다. 그렇게 된다면 국내 메이저의 한국 시장 완전 장악이 현실화한다. 1989년 국내 영화 시장에 진주한 점령군들 앞에서 영화인들은 뱀을 풀고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2007년, 한국 영화인들은 더 이상 테러리스트일 필요가 없다. 그들이 이 땅의 온전한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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