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의 가정은 안녕하십니까
  • 김진경 프리랜서 기자 ()
  • 승인 2007.04.3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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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드라마·영화 속에 비친 ‘가족의 위기와 진실’

 
마태복음 10장36절에는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반면 페스탈로치는 ‘가정의 단란이 지상에 있어서의 가장 빛나는 기쁨’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공동체가 가족이다.
가족이란 대체 무엇인가? 질문의 역사만큼 답도 다양하다. 특히 가족 간의 불화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급격히 해체되고 있는 지금,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영화, 드라마 할 것 없이 잘 만들어진 작품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이 시대를 반영한다. ‘가족’이 도마에 오른 시대, 변화하는 가족의 모습을 잘 그려낸 작품들을 살펴본다.

드라마 <하늘만큼 땅만큼>:KBS 일일 연속극 <하늘만큼 땅만큼>이 최근 방영 70회를 넘기면서도 꾸준히 전국 시청률 30%대를 확보하고 있다. 불륜이나 ‘출생의 비밀’ 등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자극적 소재를 쓰지 않고도 독보적인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보고, ‘진정한 가족’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하늘만큼 땅만큼>은 가족 구성원 간 소통 부재, 재혼 가족, 기러기 아빠, 입양아의 정체성 혼란, 조기 이혼, 출산 기피, 손자 육아 등 이 시대의 가족이 맞닥뜨릴 수 있는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각기 다른 세 가족이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건강하고 행복한 가족이란 어떤 모습인지 생각하게 된다.
제작진은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목표를 ‘가족에 대한 의미의 확대’라고 말한다. 연출을 맡은 문보현 PD는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은 혈연 중심이었다. 누가 누구의 아들인지, 누가 누구와 결혼했는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가족은 혈연뿐만 아니라 교감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동고동락하고,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 갈등도 겪지만 위로하고 협력하면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관계가 진정한 가족이라는 것이다.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아내가 결혼했다. 이게 모두다.
나는 그녀의 친구가 아니다. 친정 식구도 아니다. 전 남편도 아니다. 그녀의 엄연한 현재
남편이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녀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은 엉망이 되었다.


‘두 남편과 한 아내’가 공존하는 가정


 
이 인용문은 2006년 세계문학상 제2회 수상작인 박현욱의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의 첫머리 구절이다. 이 파격적인 제목의 소설에는 단 3명의 인물만이 등장한다. 작가의 발칙한 발상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일부일처제의 통념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거침없이 ‘칼질’하고 있다.
소설의 첫 대목이 암시하듯 아내는 기존의 결혼을 유지하면서, 새로 사랑하게 된 남자와도 결혼식을 올리고 두 집 살림을 차린다. 그 후로 ‘두 남편과 한 아내’는 딸을 낳는다. 아빠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동시에 아빠가 둘인 딸을. 보통 가족들보다 두 배로 바쁜 명절과 돌잔치를 겪으면서 힘들어진 아내는 차라리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외국으로 이민을 가자는 제안을 하고, 네 가족은 ‘통로가 따로 있는 이층집’이 있는 뉴질랜드로 떠날 준비를 한다.
이 책에도 소개되었듯, 현대 사회학의 기수 앤서니 기든스는 사랑을 세 가지로 구분했다. 열정적 사랑, 낭만적 사랑, 합류적 사랑이 그것이다. 열정적 사랑은 앞뒤 가리지 않는 맹목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이다. 심리학자 신디 하잔의 관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열정적 사랑의 지속 기간은 기껏해야 30개월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 즉 운명적 인연으로 만나 평생을 함께하는 사랑이 낭만적 사랑이다. 하지만 연애·결혼의 개념과 어우러진 낭만적 사랑이 유행한 것은 18세기 산업화 과정 이후부터라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기든스에 의하면 합류적 사랑이란 자신을 타자에게 열어 보이며, 나는 나이고 너는 너임을 인정하는 사랑이다. 그는 “낭만적 사랑과는 달리 합류적 사랑은 이성애여야 할 필요도 없고 반드시 일부일처제여야 할 필요도 없다”라고 말했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화자는 ‘열정적 사랑’에 빠졌다가 ‘낭만적 사랑’을 꿈꾸었으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아내 덕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합류적 사랑’을 누리게 된다. ‘너는 내 운명’ 식의 낭만적 사랑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그에게 아내와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인 듯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뉴질랜드 이민에 동의하는 그에게서 ‘새로운 행복’의 기미가 보인 것은 왜일까.
만약 그가 억지로 전통적 가족 형태를 유지하려 하고, 아내 역시 그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영화 <바람난 가족>: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2003년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최고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문제작이다. ‘바람’과 ‘가족’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의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남편 영작은 능력 있는 변호사, 아내 호정은 전직 무용수이다. 이들 사이에는 입양한 아들 수인이가 있다. 시아버지 창근이 알코올 중독자이며 간암으로 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이 가족은 왜 ‘바람’이 났을까?
영작은 일과 가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애인과의 섹스로 해소한다. 그녀는 나이는 어리지만 정신적·육체적으로 늘 그를 위로해주는 사람이다. 호정은 기껏해야 동네 무용학원에서 춤을 추는 게 전부인 일상이 지루하다. 그녀는 남편보다 일곱 살짜리 아들과 더 잘 지낸다. 남편과의 섹스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던 차에, 때마침 옆집에 사는 새파란 고등학생이 호정에게 ‘진하게 연애나 한번 하자’며 다가온다.
호정의 시부모 창근과 병한은 15년간 섹스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 남편이 간암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병한은 초등학교 동창인 애인과 춤을 추러 다닌다. 남편의 장례를 끝내고 그들은 아들 부부에게 말한다.
“난 요즘에야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야. 내 인생 내가 책임지는. 나, 만나는 남자 있다.”
“예?”
“있고, 결혼할지도 몰라.”
“누구, 엄마가?”
“나 섹스도 해. 안 한 지 15년 만에.”
“오 마이 갓.”
영작은 애인과 떠난 여행에서 술에 취한 채 오토바이를 몰던 지루와 교통사고가 난다. 영작은 사고의 책임을 음주 운전을 한 상대에게 미루려 했고, 결국 지루에 의해 아들 수인이를 잃고 만다.
입양했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던 아들을 잃은 후 부부의 갈등은 더 심해진다. 영작은 애인을 찾아가지만 그녀의 집에는 다른 남자가 와 있다. 호정은 고등학생 애인과 무용학원에서 바람을 피우고, 임신한다.
다시 잘 해보자며 임신한 호정을 찾아온 영작에게 그녀는 “얘, 네 아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그래도 내가 잘하겠다’는 그에게 그녀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다. “당신, 아웃이야. 안 돼, 더 이상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흐르는 음악은 <즐거운 나의 집>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그러나 이 가족에게 집은 쉴 수 있는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혈연과 법적 관계의 끈으로 이어져 있지만,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위로를 얻는 곳은 가정이 아니었다.
껍데기뿐인 울타리를 의지하고 살아가기 힘들었던 가족. 이들은 암묵적 동의하에 ‘바람’을 피우고, 그래도 관계를 회복하기 힘들어 마침내 서로를 ‘아웃’시킨다.
체면이나 주위의 시선을 솔직한 감정보다  중시해온 가족에게 이 영화는 낯선 경종이 되어 울렸다. 서로 바람 피는 것을 알아도 별 감흥이 없는 부부, 평생을 함께 살았지만 신뢰도 애정도 없는 남편이 죽자 속이 후련하다며 새 애인과 떠나는 아내. 늘 냉랭한 기운이 흐르는 이 가족이 ‘함께 있어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영화에서 호정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들 수인뿐이다.

영화 <가족의 탄생>:세 관계가 등장한다. 미라네 가족. 홀로 분식집을 하는 미라네 집에 5년이 넘도록 소식이 끊겼던 동생 형철이 갑자기 돌아온다. 스무 살 연상의 여자 무신과 결혼을 한 상태다. 며칠 뒤에는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이 낳은 딸’인 채현이가 주소를 적은 쪽지를 들고 혼자 미라네 집으로 찾아와 함께 살게 되고, 복잡한 관계와 경제적 무능력 때문에 누나 미라와 갈등을 겪던 형철은 다시 집을 나가버린다. 미라는 어머니뻘 되는 동생의 아내, 그 아내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이 낳은 딸과 함께 셋이서 기이한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게 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통념 무너뜨려


 
선경의 가족. 선경의 엄마 매자는 ‘사랑’이라면 말릴 수 없는 로맨티스트이다. 숱한 남자를 만나며 상처도 많이 받았다. 제 멋대로이지만 평생 고생만 하며 살았던 엄마를 생각하면 선경은 화가 나면서도 측은하다. 엄마가 병으로 죽자, 선경은 엄마가 남기고 간 아들 경석과 함께 살아간다. 
이 두 가족은 예쁘고 착하게 자란 채현과 경석의 만남을 통해 이어진다. 누나 아닌 누나와 단둘이 살아온 경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복잡한 사연만 가득한 집에서 두 여자를 엄마라 부르며 자란 채현. 이 두 사람의 연애는 그 어떤 관계보다 순수하고 사랑스럽다.
<가족의 탄생>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통념을 단숨에 뒤집는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들도 온갖 갈등에 맞닥뜨리지만,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받아들이며 그것들을 극복해나간다. 전통적인 가족 형성에 반드시 필요했던 ‘혼인’과 ‘출산’이라는 조건 없이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은 행복하다.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가족이 반드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그 가족의 형태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행복한 가족’의 얼굴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가족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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